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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HERO

결국은 아침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불안감에 새벽 다섯시가 넘어 겨우 잠들었는데, 여덟 시쯤에 다시 일어나 버린 인간은 핸드폰도 안 보고 있다가 점심이 되어서야 박병호가 KT로 이적한다는 기사를 보고 말았습니다. 이 팀이 FA기간동안 박병호한테 한 걸 보면 히어로즈는 박병호를 잡을 의지가 없었나 봅니다. 박병호가 떠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야구를 보는 평생동안 박병호가 이 팀에 남아있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포스팅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계속 나의 영웅이어서 너무 다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드디어 박병호가 떠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주원의 브이로그에서 박병호가 외롭다고 한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주변의 베테랑들이 하나 둘 떠나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일상/야구 2021.12.29

HERO

나의 10년은 히어로즈와 함께했습니다. 노을이 아름답던 목동구장, 사람이 몇 없던 작은 야구장에서 하늘이 사라진 고척돔으로 옮겨지고 나서도 사라진 낙조를 슬퍼하던 시간을 지나 시원하고 따뜻한 돔구장을 다시 좋아하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야구가 시작하는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을 넘어서, 환호하고 눈물짓던 가을을 열 번 보내면서 그렇게 고속버스를 타고 야구장에 가던 중학생은 야구장 옆에 사는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긴 시간동안 함께했고, 영원히 함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박병호가 이 팀과 계약을 안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은 퍽이나 허망합니다. 선수들이 사라져가는 자리에 다시 구해왔던 소중한 4번타자를, 긴 시간동안 이 팀의 중심이 되어줬던 선수를 이 팀이 얼마나 하잘것..

일상/야구 2021.12.28

탈색하기

탈색을 했다는 내용이 왜 일기쓰기가 아니라 좋아하기 탭에 있는가 하면 나는 탈색을 겁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기분이 좀 나가리다 싶으면 탈색을 해야만 한다. 이건 어떠한 종류의 중독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하게 염색이 아니라 탈색을 좋아한다. 머리털 색을 다른 걸로 물들이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색을 빼버리는 걸 좋아한다는 뜻이다. 탈색을 처음 하게 된 건 고등학교 졸업식 직전 즈음이었다. 아마도? 사실 정확히 생각이 잘 안 난다. 탈색을 하도 많이 했어야지... 아무튼 고등학교에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졸업식에 염색을 하고 온 친구들은 여럿 있었지만 모두가 밝은 갈색 정도에서 멈췄지... 형광핫핑크는 나 하나뿐이었다. 진짜 기분 최고였다. 그 후로도 회색에 핑크 옴브레, 청록색, 코발..

잡다한 것들 2021.11.19

씨발야구안보기

분명히 오늘 오후 6시 30분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총재매수팀이 우승하는 게 존나 꼴같잖고 짜증나기 때문에 KT가 이겼으면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건 오늘 10시가 되기 전까지만 유효한 감정이었습니다. 이씨발 우리 팀은 언제쯤 우승을 할까요 씨발씨발 진짜 장난하나 우리집 안방에서 우리보다 늦게 창단한 팀이 검 뽑고 씨발 온갖 지랄을 떨고 파티를 2년이나 즐기는 꼴을 쳐 보는게 지금 말이 되냐고 이 씹쌔끼들아 나도 우승 그거 하고싶다고 씨발롬들아 언제까지 내가 이 악물고 한국시리즈본다음에 치과가서 턱교정 문의해야하냐고 씨발롬들아 장난해? 우승하자고 내가 그렇게 14년도부터 염불외듯이 얘기했잖아 씨발씨발 그 선수단을 가지고 꼭 로티노나 이런 새끼 스미스 씨발 내가 그래도 크래익하고 프레이타스는 봐준다 ..

일상/야구 2021.11.18

듄(Dune, 2021)

사막을 좋아하시나요?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모래언덕과 황금빛 태양, 그리고 새파란 하늘만 존재하는 아득한 사막을 좋아하시나요? 듄은 사막은 닮아 있었다. 사막을 배경으로 했으니 어지간히 그렇겠구나 싶겠지만 그 이상으로 듄은 사막을 닮았다. 광막하고 공허하지만 장대하고 아름다우며 위압적인 사막을 닮아 있어서, 사막을 좋아한다면 이 영화도 좋아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뭐 내 주변 관객들이나 지인들은 듄을 보고 잤지만... 아무튼 나는 이 텅 빈 영화를 좋아한다. 가 떠오르는 영화였는데, 가 한낮의 선명한 황금빛 사막이라면 듄은 새벽 안개가 내리깔린 잿빛 사막과 같았다. 공허한 화면을 가득 채워주는 건 배경음악이다. 왜 이 영화가 IMAX로 유명한 거지? 영화의 몰입감을 올려주는 건 음악 장치인데...

일상/영화 2021.11.13

211101~02 와일드카드전

나는 바보같이 이 개쓰레기팀이 또 가을야구에 가기를 바랐다. 누가봐도 감독도 포기했고, 팬들도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지만 우리 영웅들이 포기를 하지 않았다. 바보같이 또 열심히하고, 운 좋게 경쟁팀이 지면서 11%의 확률을 뚫고 이 바보같은 팀은 또 와일드카드전을 했다. 작년에는 2위와 5위 사이에서 져서 5위가 되었다면, 이번에는 5위와 7위 사이에서 아득바득 5위를 해냈다. 10월 30일 최종전이 끝나고 올라온 이 트윗처럼, 영웅들은 주특기 '포기하지 않기'를 보여줬다. 그래서 사실 와일드카드전은 1차전에서 지더라도 나는 박수쳐 줄 수 있었기에 그 추운 날에 잠실구장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씨발 바보같은 팀 같으니라고. 선취점을 얻고, 따라잡히면 또 달아나고 따라잡히면 또 달아나고를 반복하면서 이 ..

일상/야구 2021.11.04

사브라도 핑크포트와인

어쩌다 구한 포트와인입니다. 와인을 아주아주아주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달달하고 도수 높은 포트와인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런데 핑크포트라니, 이건 안 마셔 볼 수 없다고 생각해서 빨리 예약하고 후다닥 사왔습니다. 병만 봐도 너무 예뻐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포트와인은 왜 맛있을까요? 달달한데 도수도 높아서 맛있는 것 아닐까요? 진짜 이게 맛의 정의고 술의 근본인 거 아니겠습니까. 한 잔 따르자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맑은 와인이 손에 쥐어집니다. 햐.... 이걸 먹으려고 내가 살았나 보다 싶고 진짜 와인은 신의 축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맛은 달콤하고 꾸덕한 딸기쨈이 와인이 된 것만 같은 맛입니다. 살짝 술의 쓴맛이 느껴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 딸기향의 은은함이 그 모든 알코올을 날려줍니다. 그..

일상/음식 2021.10.29

리히터 에스테이트 리슬링(2020, 독일)

요즘 몇 병째 마시고 있는 와인이다. '요즘'마시고 있다는 건 그러니까... 백신을 접종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는 뜻이다. 킥킥 너무 신난다. 나는 이제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다. 보통 좀 더 무게감 있는 와인을 선호하지만... 야구를 볼 때는 말이 다르다. 이 때 너무 무거운 와인을 먹다간 와인이 지나치게 쓰거나, 답답하게 느껴지고... 심지어 안주도 겁나 많이 먹게 되면서 진짜로 소화가 안되기 때문에 야구를 볼 때는 가벼운 술을 마신다. 이 화이트와인은 끝맛이 은은하게 달아서 그렇게 달다! 싶지도 않으면서 딱 깔끔해서 와인만 단독으로 한두 잔 마시기 참 좋다...에헷. 가벼운 과일 안주와 먹거나 진짜 야구를 안주로 마시기도 참 좋다. 그래서 세병인가 네병인가 마셨는데 가격도 동네 이마트에서 만 팔천원..

일상/음식 2021.10.21

자몽맥주

왜인지 야구에 불길함이 감돌았다. 그러니까, 최원태는 퐁당퐁당 투구를 하는데 오늘이 딱 투구내용이 안 좋을 날이라는 직감이 왔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달콤한 맥주를 먹기로 결심했다. 답답한 야구를 보며 안주를 먹으면 속이 꽉꽉 막히니까, 안주 없이 먹을 수 있는 가벼운 맥주를 먹어야만 했다. 몇 주 전에 식당에서, 한라봉 맥주라고 한라봉 청이 섞여 있는 달달한 맥주를 먹었는데 그게 생각이 나서 자몽맥주를 만들었다. 자몽청은 없고 자몽 마멀레이드가 있길래 그걸 넣었다, 청과 마멀레이드의 차이는 잘 모른다. 그게 그거 아닌가? 자몽 마멀레이드를 한큰술 떠 넣고 맥주를 부은 후에 머들러로 잘 저어 주고 먹으면 그만이다. 완전히 잘 안 섞여도 어차피 맥주는 추가로 또 부어 먹을 거니까 결국 가진 맥주..

일상/음식 2021.10.01

위스키 레몬 맥주

거의 매일 술을 마신다. 일주일에 5번정도 야구를 보면서 술을 마신다. 그중에 두세 번은 섞어서 먹는데, 인터넷에서 유명한 레시피를 따르기도 하고 내가 레시피를 조합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리저리 술 먹는 내용들을 올릴거다. 첫 번째는 방금 먹은 위스키 레몬 맥주다. 칵테일처럼 이름을 뭔가를 짓고 싶다. 파우스트라던다 피냐콜라다라던가, 이런 이름이 있으면 좋을것 같은데 생각나는 게 없다. 새콤하고 맑은데 은은한 위스키 향이 올라오는게 상대 실책으로 도루하는 맛이다. 그래서 이름은 '상대 실책으로 도루 성공'. 지금 야구 보고 있는 중 맞다... 술을 마시는 모든 이유는 야구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야구를 보려고 술을 마시는건지, 술을 마시려고 야구를 보고 있는 건지. 아무튼 술 없이는 야구를 볼 수 없고 ..

일상/음식 2021.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