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엔에 대한 이야기
고교야구 경기는 항상 많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커다란 전국대회가 봄, 여름, 가을에 연달아 열린다. 이 세 전국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 현내선발전이 있어 풀타임으로 항상 야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면 전국 어느 학교던 오사카의 한신코시엔구장까지 가야한다는점에서 엄청나게 피곤한 일정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언제나 꿈의 야구장인 코시엔에 선수들은 오기를 희망한다. 동대문야구장을 돌려줘 오세훈 이 XXXX야
어쨌든 일본 고교야구로 일본어 공부를 한;; 야구 오타쿠는 여름 코시엔에 로망이 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새카만 흙을 밟으면서 달리는 청춘…. 뭐 이런 거 말이다. 아침 8시부터 4개 경기가 연달아 배정되어있고 한 팀당 2시간 ~ 2시간 30분으로 끊으려다보니 공수교대시간을 포함한 모든 시간에 뛰어다녀야하는 일정인데, 역시 낭만과 야만은 한끗차이다. 그까짓 거 좀 땀 식히면서 걸으면 뭐가 덧나나….
한국 고교야구에 대해서 ‘화려한 장비를 차고 프로처럼 보이고만 싶어한다.’거나, ‘학생답게 하지 않는다.’던가, ‘야구에 대한 순수한 마음, 절박함, 열정이 없다.’라는 평을 볼 때가 있다. 그럴때면 이 사람은 한국 고교야구도 일본 고교야구도 안 봤다고 확신한다. '생각한다.' 정도의 강도 낮은 추측이 아니라. 100%를 뛰어넘는 확신이다.
무채색 유니폼과 장비가 가져다주는 순수라는 게 과연 있는가?
학생의 순수라는 게 고작 유니폼을 뭘 입고 장비를 뭘 입는다고 결정되는 거라면, 그까짓 순수는 없어도 좋다. 대부분의 이런 학생다움에 대한 요구가 그냥 학생을 ‘순수한 무언가’로 만들고싶은 성인들(정확히 말하면 비-학생)의 욕망일 뿐이다. 고교야구가 낭만적이라고 하는 것은 고작 '학생답게' 외관을 정렬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학생이기에 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이 실패하고 울고 고개숙이고나서 다시 일어서서 한번 더 공을 던지고 다시 달릴 수 있는 기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을 학생답게 만드는 건 언제나 끊임없는 응원이지, 격려를 빙자한 참견이 아니다.
어쨌든 코시엔은 개막했고, 낭만의 한 페이지는 쓰여내려가기 시작한다. 여름 코시엔이 끝난다고 선수들의 인생이 엄청나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코시엔은 프로 스카우터들에게 자신을 선보이는 무대가 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고교야구의 커다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누군가는 교가를 제창하며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상대팀의 교가를 들으며 고개숙이지 않고 버틸 것이다. 흙을 담아서 떠나는 선수들과 눈물을 떨어뜨리고 떠나는 선수들이 있다. 그리고 선배들의 여름대회를 보면서 1학년들은 가을 신인전을 준비한다. 그리고 어쨌든 내일은 찾아온다. 내일이 오면 또 여덟 학교들의 운명이 갈리고, 매일이 같지만 완전히 다른 각자의 이야기가 결정된다.
운 좋게 내가 응원하는 학교 둘이 모두 앞쪽에 배치되었다. 사이타마의 우라와가쿠인과 이와테의 하나마키히가시고교. 우라와가쿠인은 상당한 강팀이기때문에 기대했으나, 상대가 센다이육영이라 대진표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어째서 강팀vs강팀 매치가? 어떤 강팀이라도 1회전에서 약팀에게 탈락할 수 있다. 지금은 여름 코시엔이고, 여름 코시엔에서는 폭발적인 힘이 나는 법이니까. 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우라와가쿠인이 19실점이나 하며 패배한 것도 충격적이고 그와 동시에 센다이육영이 이겼지만 9실점이나 한 것도 충격적이다. 왜냐면 둘다 이럴 학교가 아니니까. 소문으로만 들었던(화면으로도 봤습니다;;) 센다이육영은 확실히 연습할때부터 확실히 몸이 단단하고 빠르다고 느꼈다. 그리고 단 한 학교도 부족한 경기를 하지 않았다. 좋은 수비를 했지만 상대의 발이 더 빨라서 아웃을 못 잡고, 좋은 주루를 했지만 완벽한 송구로 아웃을 당하는 경기의 연속이었다. 의외로 가장 실책 많이 하고 많이 흔들린게 우라와학원-센다이육영의 경기였다;; 우라와가 에러를 5개나 할 팀이 아닌데 진짜 황당하네.
코시엔을 보는 내내 한국의 수많은 고교야구 선수들이 생각났다. 이 선수들에게도 '꿈의 무대'라고 이름붙일만한 시각적인 목표가 있을까? 목표는 눈에 보여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야 더 강해지는데, 일본 고교야구선수들에게 그 꿈의 이름은 '코시엔'이다. 동대문야구장을 돌려줘 오세훈 이 XXXX야. 한국에서는 전국대회가 그냥 전국에 있는 대부분의 고교가 모여서 하는 경기에 불과하여 아쉽다. 역시 각 지역 1위를 한 팀들끼리 지역 대표가 모이는 대회가 되면 레벨이 올라갔다는 느낌이 들 텐데ㅠㅠ 한국도 팀이 더 많아진다면, 언젠가 전국대회가 1위 학교들간의 혈투가 될 수 있을까. 아아 초등학생 의무교육에 야구 넣고 중학생 의무교육에 야구 넣어서 전국민이 야구를 일단 해야한다니까? 자기 재능이 160던지는 선발투수인걸 모르고 살 수도 있잖아요 제발 부탁입니다. 전국민이 야구를 하자...
야구는 언제나 달린다. 한 시즌을 달리고 한 대회를 달린다. 경기장에서 선수들도 달린다. 이 달린다는것이 뭐길래, 어떤 의지와 노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배가 부른' 프로야구는 달리지 않고, '절박한' 고교야구는 공수교대시간에도 전력으로 달린다고 말한다. 야구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 말을 핑계로 학생 선수에게 달릴 것을 강요하고 있진 않은가 하는 생각이 항상 들었다. 그래서 코시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건 선수들의 경기력이라던가 팬들의 열기라던가 각 학교들의 화려한 응원전이 아니라 그라운드에 올라오는 모든 사람들, 심판과 그라운드 정비 직원까지도 전력을 다해 달리는 모습이었다. 하루에 네 경기를 해야 한다는 극악의 상황에서 야구를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절박한' 학생 선수라서가 아니라, 그라운드 위의 사람들이 모두 야구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났다. 그라운드 정비 사이렌이 울리면 일제히 그라운드 정비용품을 들고 직원들이 달려오고, 정비 시간이 끝나자마자 직원들은 최대한 빨리 빠져주고 선수들이 몸을 풀러 뛰어온다. 몸을 다 풀고 나면 직원들과 상호 인사를 한다. 코시엔을 꿈의 야구장으로 만드는 건 이 사람들이 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일테다.
그리고 부러웠다. 좋은 야구장에서 대회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그라운드의 흙이 모래처럼 흩날리는 목동구장이나, 관중석도 없는 신월구장이 아니라 전국에서 와서 즐길 수 있게 준비된 야구장이 있다는 점이. 그리고 두어명의 야구장 직원이 그라운드 파인 곳을 메꾸는 정도의 정비가 아니라 정비 직원 여럿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야구장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흙먼지에 뒤덮힌 야구장에서는 베이스에서 일어나는 상황도 판단이 안 될 때도 많고, 지나치게 건조하고 거친 흙은 부상을 유발한다. 이름은 전국대회지만 주말리그와 다를 바 없는 환경마저도 한국의 전국대회를 꿈과 희망의 공간으로 만들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쉼없이 달리는 청춘들이 낭만이라면, 그 희극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 된다.
10시 25분경 시작된 경기. 이미 태양은 푹푹 내리쬐고 있었고 체감기온은 45도에 육박하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서 태양빛을 한껏 받으며 까맣게 탄 선수들이 야구를 하는 모습은 상상 속의 코시엔과 아주 닮아 있었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개막일 제 1경기부터 선수가 쓰러졌고, 관객들도 경기장 안 복도에 쓰러져있곤 했다. 나도 더위를 견디면서 야구를 봤고, 결국 살이 익었다. 까맣게 탄 수준이 아니라 볕에 노출되었던 부분이 익어서 쓰린;; 상태가 된 것이다. 한국 고교야구도 한낮에 경기를 한다. 소문으로는 목동아파트 주민들이 야간 소음신고를 했기 때문이라는데, 진짜 그럴거면 야구장 근처에 왜 사냐 XX 이런생각밖에 안 든다;; 그리고 KBSA도 좀 선수 보호차 저녁경기(최소한 오후 4시 이후)를 밀고나가주지 낮 11시, 1시에 경기를 하는 건 뭐하자는건지 모르겠다. 하긴 의료진도 제대로 안 해놓는 KBSA가 뭘 하겠냐 XX. 5회가 끝나면 10분간의 쿨링타임이 주어지지만 고작 그 10분으로 열을 식히기엔 역부족이다. 극단적으로는 낮경기를 금지시키거나, 실내구장에서만 야구하게 해야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폭염주의보가 떨어지면 폭염취소를 설정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건강한 상태로 선수들이 평생 야구하는게 보고싶다고... 야구하다 쓰러지는 거 말고 계속 야구하는게 보고싶다고...
단 20명의 선수가 버텨내는 9회의 야구란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떠안기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학생들끼리만 승부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두는 것 같기도 하다.
코시엔은 규정상 한 학교당 1번부터 20번까지의 등번호만 부여한다. 오직 이 스무 명만 그라운드에 올라올 수 있다. 경기중 위기가 찾아와도 선수들끼리 마운드위에서 회의하고, 투수교체때도 교체될 선수만 올라간다. 감독이나 코치는 등번호가 없고, 그래서 그라운드에 올라올 수 없다. 그래서 재미있었던 건, 대주자 교체를 할 때였다. 3루코치로 있는 선수를 대주자로 교체하면서, 원래 주자였던 선수는 덕아웃으로 들어가고 덕아웃에서 3루 주루코치를 할 선수가 다시 나왔는데 그 과정이 아주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결국 이 말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작전을 써야하는지를 모든 선수들이 동일하게 주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전에 대해 모든 선수들이 골고루 이해도가 높은 학교가 한 계단이라도 더 위에 올라갈 수 있다. 교체된 선발투수가 1루 코치를 하고, 덕아웃에서 계속해서 작전을 외치던 선수가 몸을 풀더니 계투로 올라왔다. 이런 환경에서 선수는 쉼 없이 계속 뛰어야한다. 교체되었다고해서 쉴 틈은 주어지지 않는다. 공수교대를 할 때 장비를 풀어주고 물을 가져다주는 역할까지 모두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해결하고 있었다. 이건 고교야구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규정일진 몰라도 8월의 뜨거운 날씨에는 선수들의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결국 쓰러지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번 제 105회 전국고교야구선수권기념대회의 캐치프레이즈는 <자 가자, 우리들의 꿈으로>였다. 코시엔이 끝나고 고교야구가 끝나서 프로야구선수가 되어도, 사회인야구를 시작하더라도, 대학에서 야구를 하기로 결정하더라도, 혹은 야구를 그만두더라도 결국 그 방향에 꿈이 있었으면 좋겠다. 빛나지 않더라도, 평범해 보이더라도, 그냥 손에 잡고싶은 꿈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한국도 학업과 야구를 병행해서 여러 진로를 탐색할 수 있게 해야한다니까 교육부놈들아.
한국도 이제 대통령배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있다. 그리고 봉황대기만 하면 진짜 이번 시즌도 끝나는거겠지.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이 패배한 팀의 정신승리처럼 쓰이는 게 싫다. 져놓고서 잘 싸웠다니 그럼 됐다니. '잘 싸웠지만 졌다.'가 되어야한다. 실책 없이, 흔들림 없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내고 나서 그럼에도 내가, 우리 팀의 전력이, 그리고 우리 팀의 경기력이 상대팀보다 약했다는것을 절감하고나서 '잘 싸웠지만 졌다.'라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마침표를 찍고 다시 문장의 첫 줄을 시작할 수 있길 바란다. 다음 문장이 아니라 다음 문단으로 내려서 야구가 아닌 이야기를 시작하더라도. 어쨌든 그것도 낭만의 한 페이지가 될 테니까.
사실 아직도 사이타마 탈락한거 너무슬프고짜증남 사이타마가 코시엔이 끝이라니 내 사이타마를 돌려줘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