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정보라,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ZI0NY 2024. 10. 28. 16:14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줄 몰랐다. 정확하게 더 길게 설명하자면 한강의 책이야말로 시대가 원하는 리얼리즘이고, 일종의 고발 문학이기 때문에 수상을 많이 했고, 할것이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거라고는 거의 알렉시예비치가 노벨상을 받을 때쯤부터 생각했지만 노벨문학상이 한국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나는 한강이 노벨상을 수상한 그 날 저녁부터 다음 노벨문학상 후보로 슬쩍.. 정보라를 밀고 있다. 물론 SF가 받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겠지만 암튼 밀고 있다.

한강의 책도 리뷰를 쓰고싶은데, 솔직히 말하면 다시 읽을 자신이 없어서 미뤄두고 있다. 거의 10년 전쯤 읽었을 때도 뇌 한 구석을 쇠꼬챙이로 긁어내리는 것만 같은 따끔거리고 아프고 견디기 힘든 감각이 있었기에 지금은 더더욱 자신이 없다. 암튼 그래서 이번에 쓰는 책은 정보라의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부터 일본의 원전 폐수 해양 폐기까지의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외계해양생물과 촘촘하게 엮었다.

 

단편 연작의 첫 번째 이야기, 〈문어〉에서 강사법 제정으로 인한 대학 시간강사 대량 해고에 반대하는 농성장이 배경인 걸 보고 작가님 본인 이야기라서 시작부터 깜짝 놀랐다. 자전적 SF소설이라고 책띠에 적혀 있었는데 정말로 이정도까지 자전적일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주토끼> 정보라 작가, 연세대에 퇴직금 청구소송  이후 단편들도 모두 읽고 마지막에 작가의 말까지 읽으니, 그냥 모든 이야기가 아주 촘촘하게 작가님이 직접 경험한 현실을 배경으로 쓰여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을 고르자면 〈대게〉였다. 이 단편은 국가에 의한 취업사기와 집단학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다가 머나먼 이국에서 쪄져서 죽을 운명에 처한 대게가 주인공에게 발견되는 이야기다. 세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가서, 대게는 살아있는 다른 동료들과 만나 조직화하고 약속된 것을 받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구 인간종의 세계는 대게에게 그렇게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현실이 녹아 있었다. 이길 것 같으니까 싸우는 게 아니라지만 죽을 것을 알면서도 싸우고싶지 않은데 세상은 작은 존재를 너무도 쉽게 몰아낸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지구인의 저항도 묵살당하는 사회에서, 비록 외계해양생물이래도 저항해야만 한다.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 〈고래〉에서 일본이 방사능 폐수를 바다에 방류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에서 한 학부모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냐고 울부짖는 부분이 나온다. 이 장면을 읽으며 생각했다. 사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라던가 하는 몇 십 년, 몇 백 년, 몇 천 년 후의 미래가 아니라 당장 몇 년 후의 내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2024년 10월 28일 기준 원전 폐수는 10번째로 방류되었다. 이미 해류의 흐름을 타고 방사선 오염 물질은 태평양을 건너가버렸다면, 인간이 이미 넘어서버려 돌이킬 수 없는 마지노선들의 목록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이 책의 책띠에 인용된 책의 한 문장으로 마무리하면 딱 좋겠다.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