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야구

MY HERO

ZI0NY 2021. 12. 29. 17:55

결국은 아침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불안감에 새벽 다섯시가 넘어 겨우 잠들었는데, 여덟 시쯤에 다시 일어나 버린 인간은 핸드폰도 안 보고 있다가 점심이 되어서야 박병호가 KT로 이적한다는 기사를 보고 말았습니다. 이 팀이 FA기간동안 박병호한테 한 걸 보면 히어로즈는 박병호를 잡을 의지가 없었나 봅니다. 박병호가 떠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야구를 보는 평생동안 박병호가 이 팀에 남아있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포스팅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계속 나의 영웅이어서 너무 다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드디어 박병호가 떠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주원의 브이로그에서 박병호가 외롭다고 한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주변의 베테랑들이 하나 둘 떠나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게 행복한 은퇴가 아니라 엉망진창으로 트레이드되고, FA에서 계약하지 않고, 그냥 사라져가는 걸 보면서요. KT에서는 박병호가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성열도 유한준도 KT에 있고, 박경수 선수도 있어서 박병호가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긴 나의 인생에 박병호가 영웅의 모습으로 등장해줘서 고마웠습니다. 서건창을 보낼 때에는 서건창은 너무 아픈 손가락이고, 미안하고, 아프지 않았더라면 다치지 않았더라면 하는 수많은 IF를 남겨서 슬펐습니다. 이와 사뭇 다르게도 박병호를 보낼 때에는 그다지 슬프지 않았습니다. 어지러울 정도로 울기는 했지만요. 박병호는 언제나 나의 영웅이었고, 우상이었고, 나는 박병호가 있었기에 히어로즈라는 팀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미친듯이 쏟아붓는 동안 박병호는 항상 그 사랑에 응답하는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박병호가 사라진 히어로즈를 나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선수들이 아직 히어로즈에 남아 있어서 히어로즈가 상대 팀인 경기도 차마 못 보겠지만, 그 언젠가의 언젠가에는 찾아올 박병호의 은퇴식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을 수 있다면 그것도 아주 기쁜 일일 겁니다.

나는 박병호가 50홈런을 치던 모습으로 존재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내년에도 평범하게 '우리 형 시즌 15번째 부활했네ㅋㅋ' 라는 글을 쓰고, 평범하게 9년 연속 20홈런 유니폼을 사서 방에 걸어두고, 평범하게 박병호의 은퇴식에서 히어로즈 박병호 응원가를 부르다가 엉엉 울고, 그리고 나서 술을 퍼마시고 싶었습니다. 이제 그런 자잘한 행복은 미뤄두고 야구가 없이 어떻게 살 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내 영웅은 히어로즈는 아니더라도 언제나 영웅으로 서 있을 테니까, 나도 10년간 미친듯이 사랑했던 내 팀, 히어로즈를 놓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동안 슬프고 행복하고 짜증나고 즐거웠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팀아.

그리고 싯팔 박병호는 천년만년 행복해라. 내가 바라는 건 하나뿐이다. 행복하게 오래 야구하세요. 아프지말고 슬프지말고.

나의 영웅, 사랑하는 나의 4번타자. 내 마음속의 영원한 영구결번. BH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