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야구

10년만에 목동구장에 간다는 것은

ZI0NY 2023. 5. 22. 20:44

정확히 10년은 아니고 9년쯤 되었다. 나는 옹졸한 사람이라 박원순이 우리를 고척에 쳐 넣을 때부터 그를 저주해왔다.... 아니 잠실은 두집살림인데 왜 목동에서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게 놀던 우리를?!⁎′̥̥̥ ㅅ ‵̥̥̥
아무튼 내 사랑스럽던 추억 속의 분홍빛 노을의 6시 30분도, 알감자(덜익었다)와 떡볶이(질척질척하다)도, 신인 선수가 주로 나오던 개문인사도, 종종 이장석을 만날 수 있던 주차장도, 한국시리즈날 암표를 다 못 판 암표상 아저씨도, 분홍색 빵빵이를 팔던 아주머니도, 포장된 치킨을 팔던 아저씨도 모두 목동구장의 추억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서 고척으로 강제이사를 떠난 날부터 다시는 고척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었다. 그 결심은 꽤 오래 가진 못했다 아마도....ㅋㅋ 아 젠장 야구 언제 끊어~!

횡단보도를 건넌 후에 야구장 쪽으로 들어오는 샛길.

이 샛길을 딱 넘어오면 얼음물에 담긴 맥주캔과 분홍색 짭빵빵이(*카스가 적혀 있다)를 파는 아주머니와 포장된 치킨을 파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많은 것을 잊고 있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야구장 가는 길목에 들어오자마자 너무 익숙하게 알아봤다. 

목동구장 전경

여기가 바로 그 익숙한 목동구장 전경이다. 샛길로 나와서 주차장을 통과하면서 야구장이 보이면 벌써 설렌다. 넥센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과 엄청나게 많은;; 상대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땐 팬도 적었는데...

서건창 벽화

정체는 모르겠으나.. 서건창 201안타 기념벽화라는 이름으로 구전되고있는 목동구장의 마지막 남은 히어로즈의 유산이다. 201안타 기념벽화면 그 내용이 있을테니 그러한 의도의 벽화는 정확하게 아닐테지만, 아무튼 팬들끼리는 201안타 기념벽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나름 목동 명물이라 사진을 안 찍고 넘어갈 수 없어서 찍었다ㅋㅋ;;; 불도 안 켜진 어두운 복도에 남아있는 히어로즈의 유산....

3루 측 응원단상과 좌석

아무리 생각해도 1루가 홈인데, 몸이 자연스럽게 3루로 갔다. 진짜 황당한데 딱 문 밖으로 나와서 그라운드를 보자마자 아 우리 홈은 3루쪽이었지?!! 하고 뒤늦게 깨달았다. 너무 익숙한 풍경, 그리고 저 좁디좁은 좌석에 영웅, 우승도전 탑을 세우고 거기에 정석단장이 올라가서 깃발을 휘두른 게 엊그제같다. 언제라도 다시 밴헤켄이 나타나서 수훈선수로 뽑히고, 방송사 인터뷰 백그라운드 배경을 뒤에 두고 손을 흔들어 줄 것만 같은 추억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기분이었다. 이젠 그때 한국시리즈 멤버는 아마도 홍원기 하나 남았지만... 아 문성현도 있나..? ㅠㅠ

3루에서 본 야구장 시야

이 뷰는 정말 여전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오기 싫었던건데. 야구장은 여전하고 히어로즈라는 팀도 여전하지만 선수들은 팀을 떠났고 우리는 이 야구장을 쓰지 않는다는게 괜히 슬퍼질 것만 같아서 꿋꿋히 안 온 건데. 후회가 되면서도 여전히 목동구장이 내가 애정을 듬뿍 쏟은 그 목동구장같아서 좋기도 했다.

1루 좌석 시야

그리고 난생처음 1루측에 앉아봤다. 우리 한줌단은 저 적은 좌석도 다 못 채우곤 했는데, 라는 생각도 들고 저기 홈런 폴대 끝쪽에 잠자리채를 들고 앉아서 홈런볼을 받으려고 노력하던 팬들도 생각나서 좀 웃펐다. 새삼 너무 작아보여서 저것도 다 못 채운 넥센히어로즈는 대체..? 무슨 팀이었을까...?

3루측 2출입구

3루 2출입구는 개문행사를 하던 출입구다. 이런걸 내가 왜 기억하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보자마자 떠올랐다. 일찍 오면 신인급 선수들과 장석이와 치어리더선생님과 인사를 하며 입장할 수 있었다. 한때 병욱이랑 하성이도 개문인사를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전히 #키움히어로즈의브라이스하퍼임병욱이간다 라는 밈을 생산하고 있고 하나는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아기하성이 기특해요ᖭི(ˊᗜˋ*)ᖫྀ 근데 히어로즈의 흙묻은고구마 막내갓기하성이라고 맨날 부르는걸 아직도 못고쳐서ㅅㅂ 나중에 하성이가 서른여덟살에 돌아왔을때 헉 아기하성아 돌아왓군아!!! 이러다가 ㄴ뭐야 아저씨한테 왜 아기라고함? 모에화 쩌네 이런 인용알티 천만개 달리면서 트위터에서 싸불당하지 않을까 무섭긴 하다;; 그치만 나한텐 하성이가 덕아웃 막내인데

야구 끝나고 오목교역 가는 길

여전한 것들... 주차장, 혼잡시 북문을 이용하세요라는 전광판(하지만 혼잡한 때는 자주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암표상 아저씨들과 경찰이 떠돌던 애매한 공간은 작은 공원과 벤치가 조성되어있었다. 한때는 퇴근길에 선수들을 보는 일이 별로 중요치 않아서 느지막히 야구장을 떠나면 지하철출퇴근하는 선수들과 함께 가기도 했다. 선수 한 명이 나한테 사인해줄까요? 하고 물어봤는데 거절한 적이 있다. 근데 진짜 죄송한데 이름도 생각 안 남... 그는 방출되었겠지?

밴헤켄을 만났던 횡단보도

이 횡단보도야말로 추억이 가득한데, 여기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퇴근하는 밴헤켄을 만나서 싸인을 받았다. 마침 가방에 매직과 유니폼이 있어서 싸인을 받고 엄청나게 기쁘게 오목교역으로 갔었다. 그때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기억한다. 
그리고 이렇게 파편이 다 되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은 이게 끝이다. 엄청 슬플 줄 알았는데! 사실 그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안 슬픈 건 아니고 목동이 안 그리운 건 아니지만 고척에서도 좋은 추억들이 많이 쌓여서 이제 좀 괜찮아지는 중인 것 같다. 물론 고척 시야는 쓰레기고 이걸 이따위로 계획하고 돈은 뒤지게 많이 들인 오세훈은 아직까지도 내가 저주하고 있다..

아니 생각해보니 황당하네.... 10년째 (사실 넘었다) 야구를 보고있다는게.... 이제 좀만 지나면 새로 입단하는 선수가 살아온 날보다 내가 야구를 본 날이 더 길어진다 으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