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야구

HERO

ZI0NY 2021. 12. 28. 22:15

나의 10년은 히어로즈와 함께했습니다. 노을이 아름답던 목동구장, 사람이 몇 없던 작은 야구장에서 하늘이 사라진 고척돔으로 옮겨지고 나서도 사라진 낙조를 슬퍼하던 시간을 지나 시원하고 따뜻한 돔구장을 다시 좋아하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야구가 시작하는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을 넘어서, 환호하고 눈물짓던 가을을 열 번 보내면서 그렇게 고속버스를 타고 야구장에 가던 중학생은 야구장 옆에 사는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긴 시간동안 함께했고, 영원히 함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박병호가 이 팀과 계약을 안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은 퍽이나 허망합니다. 선수들이 사라져가는 자리에 다시 구해왔던 소중한 4번타자를, 긴 시간동안 이 팀의 중심이 되어줬던 선수를 이 팀이 얼마나 하잘것없이 대우했는지 새삼 깨달아서 이 팀을 사랑해 왔던 세월이 가여울 따름입니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은 하나 둘 사라져가는데, 그리고 앞으로 사랑할 사람들도 하나둘 버려질텐데 내가 어떻게 이 팀을 더 바라볼 수 있을까 싶습니다. 선수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말 뒤에 숨어서 그저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는 팀에게 애정을 담기는 참 어렵습니다.

박병호는 내 영웅이었습니다. 영원히 손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이고 구심점이었습니다. 내가 서건창을 사랑했던 게, 계속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고 또 다시 일어나서 나도 힘들고 무너져내려도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응원했다면 박병호는 조금 달랐습니다. 저렇게 단단하고 강인하게 서서 영원히 있어줄 것만 같아 힘들고 지쳐 있어도 붙잡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흔들림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박병호가 미네소타로 떠났던 그 2년 동안 잠시 야구를 보지 않았습니다. 몇 번 보았지만, 그냥 이건 우리 팀이라는 안정감이 없어서 금방 그만뒀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제 내년에는 나는 야구를 볼 수 있을까요?

은퇴식을 수도 없이 생각했습니다. 김태균이 은퇴를 하고, 오주원이 은퇴를 하고, 비슷한 연배의 많은 선수들이 하나 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나가는 걸 보면서 박병호의 은퇴는 내가 어떻게 내 눈으로 볼지 고민했습니다. 염불외듯이 52살까지 같이 야구하자고, 항상 1루에는 박병호가 있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계속 은퇴식을 준비했습니다. 박병호가 떠나는 날 울지 말고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자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팀 프런트에게 홀대받으며 다른 팀에 이적설이 뜨는 걸 보니 나는 손승락의 은퇴식도, 유한준의 은퇴식도 모두 원정 좌석에서 보듯 박병호도 그렇게 보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10년이 헛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시간동안 나는 즐거웠고 슬펐고 행복했고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온 마음을 쏟아부은 시간이 보석처럼 추억으로 남는 게 아니라 모래처럼 부서져 흩어지는 걸, 다시 반복하는 일은 결코 유쾌한 시간은 아닐 겁니다.

이렇게 감정만 뚝뚝 잘라넣은 일기를 쓰면서도 내일에는 박병호가 결국 우리 팀과 계약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프랜차이즈 대접도 안 하고 베테랑들을 외롭게 만드는 쓰레기같은 좆거지구단이지만 그래도 박병호가 내 영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괜히 찌라시같은 것에 낚여서 혼자 쳐 우는 정신병자였으면 좋겠습니다. 결과를 보기가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내일 해가 뜨지 않기를, 지구가 이렇게 멸망해버리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냥 언플에 놀아나서 쳐 운 한심한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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