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27

봉현, 《그럼에도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이 책은 아주 평범한 이야기인 동시에 아주 특별한 이야기다. 문득 자신을 돌아본 20대라면 흔히 느끼는 불안과 불안정, 지금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외국이 두려운 동시에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한국 땅은 나를 점점 작아지게 하지만 어쩌면 저 머나먼 나라에는 자유가 있다는 꿈을 꾸는 시기 말이다. (그리고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했다면 서울에서 느끼는 불안에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진짜로 떠나서 몇 년간 돌아오지 않는 것은 특별하다. 떠났다가 돌아올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서울에서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커녕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막함이 사람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의 작가는 떠났고, 돌아왔다...

일상/책 2025.04.10

환상 문학 단편선,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어린 날의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작품을 두 개 꼽자면, 《폭풍의 언덕》과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가 있다. 전자는 해피엔딩만 있던 나의 소설 세계에 배드엔딩과 열린결말을 가져왔고, 후자는 판타지문학과 현실..문학? 이 나누워져있던 나의 세계에 현실에 비현실이 섞인 문학을 가져왔다. 참고로 폭풍의언덕을 너무 어린 나이에 읽으면 피폐물 마니아가 된다. 권장연령(초등학교 5학년 이상)보다 늦게 읽어도 된다. 물론 나는 초등학교 입학한 첫 해에 읽었다...미친놈. 아무튼 다시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이야기로 돌아오면,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는 혈육이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다. 이 때 내 혈육은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미쳐 있었고,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인 「샹파이의 광부들」을 읽기 위해서 대출해왔다..

일상/책 2024.11.26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

나는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보는 사람이다. 같은 작품을 다시 본다고 지루해하지도 못하고, 등장인물들이 나타나는 첫 장면부터 울어 버리는 사람이다. 《인터스텔라》에서 5차원의 책장 뒤에 갇힌 쿠퍼 씨처럼,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싹싹 빌면서 엉엉 울곤 한다. 《인터스텔라》에서는 보통 처음 머피가 바람 부는 날 자신의 방에서 모스 부호를 발견했을 때부터 운다. 이정도면 거의 미친놈 아닐지.. 《승리호》에서는 꽃님이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부터 울기 시작한다. 뭐 이런 식으로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울어서 표지만 봐도, 포스터만 봐도 눈물이 나는 작품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이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 수록된 박애진의 「토요일」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너무 슬프다.「토요일」을 ..

일상/책 2024.11.25

박애진, 《바람결에 흩날리고 강을따라 떠도는》

내가 어떤 책을 싫다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보통 싫다고 말하기 전에 가져다 버리기 때문에. 그런데 이 책은 버리기엔 재밌고, 읽기엔 그다지 내가 좋아하는 서술은 아니다.영주나 상인이 후원하는 '여행가'라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관이다. 그리고 책 뒷표지에는 '그곳에서는 금이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고, 강물에 섞여 흐른다고 했다.'라는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그래서 초반에 읽으면서 주인공이 시련과 고난을 지나서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가는 이야기일지 추측했다. 아무래도 황금의 폭포는 엘도라도 이야기니까... 생각과는 조금 다른 전개였지만, 아무튼 그래서 싫었다는 건 아니고 다른 이유로 읽기 피곤했다...일단 앞부분에서는, 주인공의 시련이 정신적인 쪽을 자극하는 동시에 육체적인 쪽에도 있어서 읽는 내가 너무..

일상/책 2024.11.23

박애진, 《귀여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이 책은 쓸까말까 생각이 많았다. 왜냐하면 내가 앞서 쓴 리뷰들과 대부분 겹치기 때문에..「낙원」은 《U, ROBOT》의 「파라다이스」이고, 「토요일」은 거의 마지막으로 쓰려고 순서를 잡아둔 《여성작가SF단편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다. 「우주를 건너온 사랑」은 《일상 탈출 구역》에 수록되어 있으며, 「깊고 푸른」은 《당신의 간을 배달하기 위하여》에, 「4퍼센트」는 《우리의 신호가 닿지 않는 곳으로》에 있다. 그럼 단 세 편이 남는데, 바로 「호수의 여신」, 「착한 아이 피노」, 이 책의 대제목이기도 한 「귀여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다. 그래서 이 책을 빼고 《바람결에 흩날리고 강을 따라 떠도는》과 《지우전》의 순서를 가지려고 했으나... 슬프게도 《지우전》을 못 샀다.... 그래서 《귀여움이 세상을 구원하..

일상/책 2024.11.22

박애진, 《명월비선가》

또 왔다! 조선스팀펑크! 이 책은 《기기인 도로》에서는 도로가 단편들을 연결하는 공통 인물로 등장한다. 그 중 박애진의 「군자의 길」과 세계관을 같이 하는 책이다. 회회인의 얼굴을 한 기기인인 '도로'는 '명월'이 유일하게 갖지 못한 남자다. 9년만에 도로가 다시 명월이 있는 명월관으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책의 막바지에 휘몰아치기보다 한 겹 한 겹 얇게 쌓아올라가는 명월의 집념과 욕망, 고민이 책에서 주를 이룬다. 결말은 그저 독자들이 추론한 그 모든 레이어들을 확정시킬 뿐이다.  명월은 유일하게 도로가 인간이 아니라 기기인인 걸 눈치챈 사람이고, 그래서 그의 몸을 탐할 이유가 가장 없는 자인 동시에 그가 기기인이기 때문에 가장 그를 탐하는 자가 된다. 이 때만 해도 명월의 목표가 진짜 인간에 ..

일상/책 2024.11.20

조선 스팀펑크 연작선 《기기인 도로》

드디어 왔다. 조선스팀펑크! 《기기인 도로》는 조선시대에 증기기관이 있었다면... 이라는 if에서 시작되는 단편 연작선이다. 읽을수록 도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기도 하지만 말은 또 다 되는 이상한 재미가 있다. 역사랑 다른 것은 하나도 없는데, 기묘사화에 증기기관이 얽혀 있질 않나, 증기마와 증기마차를 타고 이성계가 전쟁엘 나가지 않나, 홍국영이 로봇이질 않나, 하나같이 역사와 다르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맨 첫번째로 수록된 김이환의 「증기사화」를 읽으며 훈구와 사림의 대립과 그로 인한 사화, 그리고 조광조와 주초위왕(이 소설에서는 초승심위왕이다) 사건을 사관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이것에 촘촘하게 증기기술이 엮어 둔 것이 기묘했다. 말이 되는데 말이 안 되는 이상한 이야기를 읽은 느낌이 들어서 더 ..

일상/책 2024.11.19

전래동화 앤솔러지 《당신의 간을 배달하기 위하여》

어제는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설화나 민담 속에 나오는 이들이 현실에서 사는 모습을 읽었다면, 오늘은 동화 속의 나오는 이들이 미래에서 사는 모습을 읽을 차례다. 기계 기술자인 심청이는 동화처럼 인당수로 들어가고, 안드로이드 로봇은 용왕을 위해 클론의 간을 가지러 가며, 오누이가 아닌 두 아이는 줄을 타고 태양의 비밀 가까이 다가간다. 장화를 찾아서 우주로 나서는 홍련이 있으며, 흥부처럼 행동하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과학적 믿음이 있는 사회가 있다.  다섯 편의 단편 중 박애진의 「깊고 푸른」은 심청이 이야기다. 눈이 먼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의 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인당수에 들어가야 한다. 캐릭터성이 오직 심성이 고운 효녀로만 강조되었던 전래동화 속 심청이와 다르게, 「깊고 푸른」의 청이는 기계를 잘..

일상/책 2024.11.17

박애진, 《우리가 모르는 이웃》

《우리가 모르는 이웃》은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다름을 억눌러서 주변과 비슷해보이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다름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고 나서 후회하기도 한다. 동시에 '우리'와 별다를 바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구미호도, 불멸자도, 늑대인간도, 흡혈귀도 있다. 이들을 뭐라고 통칭하며 독후감을 써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요괴리가 모르는 이웃》은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다름을 억눌러서 주변과 비슷해보이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다름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고 나서 후회하기도 한다. 동시에 '우리'와 별다를 바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구미호도, 불멸자도, 늑대인간도, 흡혈귀도 있다. 이들을 뭐라고 통칭하며 독후감을 써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괴물, 괴수 ... 하지만 괴상하게 생긴 물체도 아..

일상/책 2024.11.16

SF 작가의 고전 SF 오마주 《책에서 나오다》

어제 아서 코난 도일의 《마라코트 심해》를 읽었다면 오늘은 그의 오마주인 「미싱 링크」를 읽을 차례다. 《책에서 나오다》에는 「미싱 링크」를 포함한 7개의 오마주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마라코트 심해》와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어슐러 K. 르 귄의 작품 중 몇 권 뿐이라서 아직  《책에서 나오다》를 다 읽진 않았다. 오마주를 먼저 읽으면 원작? 고전SF를 읽을 때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놔두고 있기 때문이다. 박애진의 「미싱 링크」는 아서 코난 도일의 《마라코트 심해》와 반대다. 마라코트 박사가 심해를 탐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내려갔다면, 설여울 박사는 지상의 공기층과 대륙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위로 올라간다. 여기서 내가 가진 의문은 지구의 육지 ..

일상/책 202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