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날의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작품을 두 개 꼽자면, 《폭풍의 언덕》과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가 있다. 전자는 해피엔딩만 있던 나의 소설 세계에 배드엔딩과 열린결말을 가져왔고, 후자는 판타지문학과 현실..문학? 이 나누워져있던 나의 세계에 현실에 비현실이 섞인 문학을 가져왔다. 참고로 폭풍의언덕을 너무 어린 나이에 읽으면 피폐물 마니아가 된다. 권장연령(초등학교 5학년 이상)보다 늦게 읽어도 된다. 물론 나는 초등학교 입학한 첫 해에 읽었다...미친놈. 아무튼 다시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이야기로 돌아오면,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는 혈육이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다. 이 때 내 혈육은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미쳐 있었고,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인 「샹파이의 광부들」을 읽기 위해서 대출해왔다. 집에 새 책이 왔으니 덩달아 나도 읽었는데 사실 나는 지금도 다른 단편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오직 「학교」뿐
「학교」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참 길다. 초등학생때쯤 읽고 잊고 있었는데 문득 고3이 되었을 때 이 내용이 생각났다. 학생을 먹어치우는 학교, 자퇴생이 되면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날거라고 말하는 어른들, 도망치고 숨는 방법밖에는 찾지 못하는 주인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도저히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거다. 책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있는 책이었단 것 외에 생각나는 게 없어서 고양이와 커피를 넣어서 얼마나 검색을 했던가... 그리고도 놀랍게도 찾지 못하다가,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을 살 때쯤에 SF라는 키워드를 넣어서 검색하고, 그러다가 환상문학이라는 키워드를 넣고, 이영도를 떠올려서 추가해서 검색에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끝에 찾아냈다! 그게 거의 몇 년 전의 일이다. 물론 이미 책은 절판되어서 중고로, 중고로도 잘 안 팔았다. 아 비인기 장르의 설움이여! 그런 기나긴 과정을 거쳐서 찾아냈다. 이영도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에 책을 검색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정말 본론으로 돌아가서, 「학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학교」는 크게 두 공간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나는 학생들이 사는 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자퇴생들이 사는 숲이다. 그리고 어른들이 사는 회사도 있지만 이 이야기는 학생인 주인공의 시점이므로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학교」에서 '학교'는 학생을 잡아먹는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학교가 낡거나 고장나는 등 손볼 곳이 많으면 많을수록 학교는 더 많은 학생을 먹어치운다. 학교는 학생으로 유지된다. 학생이 학교를 청소하고 화단을 가꾸고, 그리고 목숨을 바쳐서 유지한다. 그리고 짧은 서술로만 등장한 '회사'는 학교보다 더 많은 제물을 요구한다. 그럼 이런 위험한 학교를 나가지 않는 이유가 또 있을 것이다. 이유는 야생, '숲'에 있다.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숲에는 멀쩡한 '학생'을 타락시키는 '자퇴생'과 '퇴학생'이 있고, 인간을 공격하는 '야수'가 있다. 또, 학생이 낳은 아이는 영영 인간이 되지 못하고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 된다. 학교가 학생들을 규격과 제도 속에 밀어넣어 죽였다면 학교 밖은 야생속에 방황하는 학생을 죽인다.
그런데 「학교」의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읽다보면 사실 이게 크게 현실과 다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학생들이 손 댄 것이 많은 학생중심의 민주적인 학교는 학생들에게 꽤 괜찮은 학교가 된다. 그러면 학생들의 자살율이 떨어진다. 학생들이 직접 손댈 수 있는 것이 없는 압박적인 학교는 학생에게 더 많은 제약을 강요하고 이는 학생들의 스트레스로 이어져 당연히 자살율이 올라가게 되는 것처럼 학교는 학생의 노력이건 목숨이건 무언가를 학생에게서 얻어내며 존재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말한다. '아무리 학교 다니는게 힘들어도 자퇴하는것보단 낫다'고. 자퇴하면 영원히 인생의 패배자가 될 거고, 가출팸같은데나 갈거고, 평범한 인간의 궤도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될 거라고 공포를 주입한다.
실제로 '숲'은 위험한 곳이 맞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어른들이 말한것처럼 자퇴가 그렇게까지 공포스럽고 끔찍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아니듯, 소설에서도 그냥 그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학교'의 위험과는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숲도 그랬다. 학교에서보다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또 다른 자유는 포기해야 안전하게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직접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채집해야 했고, 만들어야 했으며, '어른'들이 아이들을 잡기 위해 쳐둔 덫을 피해 다녀야 했다. 학교에서는 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타깃이 되어 학교의 희생자로 결정되었지만, 학교 밖에서는 연애도 결혼도 자유로웠다. 다만,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기는 괴물이 되어 다시 인간 무리의 안전을 위협한다.
여기서 주인공인 '혜경'은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도 아니고, 불합리에 의문을 갖는 사람도 아니다. 회피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예민하고 날카롭지만 최대한 아닌 척 하는 사람이기도 하며 주변을 돌아보지도 못하는 동시에 한 걸음 떨어져 주변을 관조할 뿐인 사람이다. 어떤 때는 자신이 해야 하는 말까지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기를 원하지만 이것을 부탁하지는 않고, 단지 떠넘겨놓은 말을 대신 건네주기를 마음 속에서나 바라는 사람이기도 하다. 비겁하고 이기적이지만 악한 것은 아니며, 생존이라는 한 가지 목표에만 매몰된 사람이기도 하다. 사실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혜경을 생각하며 묘사하다 보니,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언하고 싶지도 않아진다. 혜경은 단지 불안정한 고등학생일 뿐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과 바라지 않는 것도 구분하지 못하고, 다정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먼저 다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며, 단지 상처받고 싶지는 않아며 몸부림치고 있는 고등학생이다.
'일상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봉현, 《그럼에도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0) | 2025.04.10 |
---|---|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 (2) | 2024.11.25 |
박애진, 《바람결에 흩날리고 강을따라 떠도는》 (3) | 2024.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