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보는 사람이다. 같은 작품을 다시 본다고 지루해하지도 못하고, 등장인물들이 나타나는 첫 장면부터 울어 버리는 사람이다. 《인터스텔라》에서 5차원의 책장 뒤에 갇힌 쿠퍼 씨처럼,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싹싹 빌면서 엉엉 울곤 한다. 《인터스텔라》에서는 보통 처음 머피가 바람 부는 날 자신의 방에서 모스 부호를 발견했을 때부터 운다. 이정도면 거의 미친놈 아닐지.. 《승리호》에서는 꽃님이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부터 울기 시작한다. 뭐 이런 식으로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울어서 표지만 봐도, 포스터만 봐도 눈물이 나는 작품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이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 수록된 박애진의 「토요일」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너무 슬프다.
「토요일」을 기점으로 내가 SF를 보는 범위가 꽤 많이 늘어났다고 생각해서, 이 단편은 나한테는 나름대로 아주 의미가 깊다. 이전에 많이 보던 작품을 꼽자면 《공각기동대》나 《루시》, 혹은 《소스 코드》처럼 기술과 인간성, 윤리에 대한 내용이나 《퍼시픽 림》, 《터미네이터》처럼 그냥 냅다 로봇액션영화를 좋아했다. 물론 《월-E》도 좋아했다. 텀블벅 후원으로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을 사서 읽었을 때, SF가 주가 되지 않는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 해야하나? 로봇도 나오고 인공지능도 나오고 먼 미래도 나오지만 결국 사람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SF라는 조미료를 뿌린 평범한 이야기를 읽은 게 (내가 기억하기로는) 처음이라서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과학 기술을 특별히 설명하지도 않고, 그냥 그런 기술이 있다. 그냥 그렇다~ 라고 넘어가는 게 이 때 나의 흥미를 자극했던 것 같다.

박애진의 「토요일」도 그렇다. 평행우주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마음대로 시간선이 다른 각 우주를 이동하다가 시간이 꼬여 버렸고, 그걸 막기 위해 시간의 댐을 만들려 했는데 누군가가 구멍을 뚫어서 혼자만 우주를 돌아다니려다가 그 구멍이 터지기 직전까지 갔는데 그 폭발의 순간 주인공이 무너지는 구멍의 마개가 되어서 시간이 붕괴하는 것을 막고 그 시간의 틈새에 갇혀서 매일 똑같은 하루를 반복한다는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맞게 썼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주인공의 시간은 고정되어있고, 다시 시간의 흐름이 제대로 정리될 때까지 '토요일'을 산다. 지금 이거 생각하니까 또 눈물난다. 영원이 아니지만 영원히 갇힌 삶,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선택했다간 모든 우주의 시간의 흐름이 불안정해질걸 아는 삶, 그래서 매일 다르게 찾아오는 같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구멍을 뚫은 나쁜새끼를 잡는 히어로물이 아니다.
이 평행 우주에서 대단한 위인들의 삶은 시간에 '고정'된다. 어떤 시간선이든 뉴턴이 중력을 발견하고,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개발한다는 것에는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인공, 김세경의 부모님의 삶도 '고정'되어 있다. 어떤 우주에서도 모두 같은 사람과 결혼해, 같은 아이를 낳고, 같은 시간에 죽을 것이다. 유일하게 시간의 틈새에 갇혀있는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다시 이 틈새에서 자신의 아이를 꺼내고 시간을 흐르게 하기 위한 마음도 상대성이론만큼이나 대단한 삶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곱살짜리 아이라도,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 우리 딸이 잘 지내는지 봐 달라는 다른 우주의 내가 보낸 메시지를 받으면 주인공에게 달려온다. 우주를 건너온, 고정된 사랑이다.

전혜진의 「바이센테니얼 비블리오필」은 낡아빠진 책친놈의 미래 이야기 같아서 좋아하고, 권민정의 「치킨과 맥주」 지금도 혼자 사는 여자에게는 흔히 있는 공포이며, 남유하의 「국립존엄보장센터」는 존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아밀의 「로드킬」은 지금 정부가 여자를 대상으로 하고싶은 정책이며, 박소현의 「기사증후군」은 이 퍽퍽한 현실을 우스꽝스럽게 풀어냈다. 아 가슴으로 빔 쏘는 소설이 있었는데, 「기사증후군」이랑 읽으면 재밌을텐데 못찾겠다. 일단 너무 웃겨서 사진찍어둔 부분을 덧붙인다. 이 책 찾아내면 꼭 적어둬야지.

찾아냈다. 『미드나잇 레드카펫』에 수록된 「찌찌레이저」다. (2025.05.09 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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