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지 야구에 불길함이 감돌았다. 그러니까, 최원태는 퐁당퐁당 투구를 하는데 오늘이 딱 투구내용이 안 좋을 날이라는 직감이 왔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달콤한 맥주를 먹기로 결심했다. 답답한 야구를 보며 안주를 먹으면 속이 꽉꽉 막히니까, 안주 없이 먹을 수 있는 가벼운 맥주를 먹어야만 했다. 몇 주 전에 식당에서, 한라봉 맥주라고 한라봉 청이 섞여 있는 달달한 맥주를 먹었는데 그게 생각이 나서 자몽맥주를 만들었다. 자몽청은 없고 자몽 마멀레이드가 있길래 그걸 넣었다, 청과 마멀레이드의 차이는 잘 모른다. 그게 그거 아닌가?
자몽 마멀레이드를 한큰술 떠 넣고 맥주를 부은 후에 머들러로 잘 저어 주고 먹으면 그만이다. 완전히 잘 안 섞여도 어차피 맥주는 추가로 또 부어 먹을 거니까 결국 가진 맥주를 다 먹을 때까지 자몽청이 다 녹기만 하면 된다. 달달하니 야구가 갑갑해도 술을 홀랑홀랑 잘만 넘어갔다. 이번에도 아무래도 술 이름을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이 가볍고 은은한 달콤함, 그리고 약간의 쌉싸래한 자몽 맛을 뭐라고 이름붙여야 할 지 모르겠다. 홈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고, 안타라고 하기엔 쌉싸름한... 운좋은 창조병살이나 기적의 무실점.. 정도를 붙이고 싶은데 무실점이 이렇게 가볍나? 그래서 이름을 '창조병살'로 지었다.
창조병살 상황은 이렇다. 우리 팀 수비 상황, 1사 주자 1루 상황에서 타자가 타격했다. 공은 땅에 바운드되었고, 어라라? 이거 완전 땅볼아웃 코스인데? 했더니 수비 송구 실책으로 이 씨발놈들이 공을 사람이 없는 곳에 던졌다. 그 와중에 1루주자는 3루까지 뛰고 있고... 어라라? 이상하다 3루에서 주자가 잡혀 버렸다. 그리고 그와중에 슬쩍 2루까지 뛰던 타자도 어라라? 3루 아웃 잡고 나서 수비들이 정신을 차렸는지 2루에서 타자가 잡혀 있다? 그래서 결국 쓰리아웃이 잡히고 공수교대, 광고가 나온다. 그럼 이 씁쓸하고 가벼운 수비에 한숨을 쉬어야할지 그래도 운 좋게 투아웃을 더 잡아서 공수교대 하는 달달함을 즐겨야 할지 애매하다만 기분은 아무튼 개운하다. 딱 그런 맛의 맥주다. 실책의 쓴맛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쨌든 무실점으로 막았으니까. 그래서 자꾸 호록호록 마시게 되는 그런 달콤쌉싸래한 자몽맥주가 되는 것이다!
앗, 이 와중에 점수를 엄청나게 털리고 있다. 맥주는 다 마셨고 창조병살 상황도 없었다. 우리는 그냥 계속 안타를 시원하게 맞고 있다. 좀 이기면 안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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