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승윤 노래 퀴어Queer하게 듣기

ZI0NY 2022. 3. 6. 19:33

사람도 없는 일기장 같은 블로그지만 누군가는 이걸 볼 수도 있을 거다. 누군가는 그렇다고 여길 거고 누군가는 불쾌하게 여길 거다. 퀴어란게 원래 항상 그래왔다. 존재만으로도 불쾌함이 되는 사람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왔는걸. 나한테 갑자기 이성만 사랑하라고 하면 '뭐 어쩌라는거야?'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 편견과 차별이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운 좋게 시스젠더로 태어나 운 나쁘게 헤테로는 되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아무튼간에 이 내용은 가수 이승윤씨의 성적 정체성이나 지향성과는 전혀 관련 없는, 그냥 바이로맨틱인 내 관점에서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느낀 어떤 공감과 심리적인 안정감, 혹은 평화에 관련된 후기다.

퀴어는 원래 '이상한, 기이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의미 전복으로 어느 순간부터 '성소수자'를 칭하게 되었다. 성소수자는 타인으로부터 아주 이상하고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당했지만, 스스로 이방인임을 선언하고 그 언어를 빼앗아 온 단어가 바로 퀴어Queer다. 싱어게인을 보면서 난 이승윤씨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내 취향의 가수라 함은 요아리나 소정이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결국 이승윤을 가장 좋아하게 된 건 치티치티뱅뱅 무대를 본 이후였다. 이 사람은 그랬다. 남에게는 기괴함게 이상함을 안겨주는 모난 돌, 이방인 같은 존재라는 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검색해서 30호 가수가 이승윤이라는 걸 알아냈고, 이 사람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속하지 못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는 얼마나 불안정하며, 불안정한 나에게 얼마나 큰 안정이 되는가.


https://youtu.be/Jdy1Goqq_8E

<반역가들>에는 이해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다는 내용의 가사가 나온다. 비록 진실할 수는 없는 반역가들이더라도, 알아보기 힘들지만 모른척하기도 어려운, 어설프고 검증받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가사를 음악의 템포 속에서 천천히 들으며 나는 조금 슬프고 많이 기뻤다. 나는 검증 받지 않은 인간이며, 나 스스로도 확신을 못 내리는 불안정한 인간이며, 그럼에도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인간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퀴어란 참 애매한 존재다. 그냥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 남은 함부로 알 수 없고 그냥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다. 세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선명히 보이는, 티끌처럼 선명하게 눈에 거슬리는 채로 존재하기를 언제나 갈망한다. 사실 이 평탄하고 평안한 시스젠더 헤테로 세계관에서 퀴어임을 드러내는 건 어쩌면 아주 위험하며, 불안정하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다만 그래도 나는 퀴어로서 꿈꾼다. 나를 모른척하지 않고 내 존재가 여기 있음을 모두가 알기를, 나 외의 또다른 퀴어를 위해 조용히 흔적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수많은 타인에게 퀴어임을 이해받을 수 있기를 꿈꾼다. 나는 헤테로인 것처럼 살고싶은 게 아니라, 퀴어여도 괜찮은 삶을 살고 싶다. 


https://youtu.be/o0qvfoLIoXg

<영웅 수집가>는 격렬하다. 사실 퀴어적으로 읽으니 퀴어적인건데, 모든 소수자 집단에서(혹은 그냥 집단에서도) 공감할 것만 같은 이야기다. 소수자 집단에서는 한 사람의 '영웅'이 쉽게 대표되곤 한다. 자신이 소수자임을 드러내기 꺼리는 분위기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그만큼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모든 상황의 대표성을 띄게 되곤 한다. 난 그렇게 대표된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아무튼 그가 영웅이 되고 싶었건 되고 싶지 않았건간에, 그는 영웅이 되며 추종자가 생긴다. 그리고 그 추종자는 그의 지지가 되기도 하지만 그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 <영웅 수집가>의 가사처럼, '다만 내가 원할 말만 영원히 하면 돼 / 걸음걸이도 한치도 어긋나지만 않으면 돼'의 내용 그대로 이제 주변에서는 모두 그 영웅의 목을 졸라서 진열장에 놓으려 한다. 그가 숭고하고 대단한 무엇으로만 존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그렇겠는가, 욕도 하고 짜증도 부리고 불만도 토로하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이전까지의 모든 행보를 부정당한 채 폄훼된다. 추종자도 목을 조르지만 언제나 그의 몰락을 지켜보던 혐오자들도 기다렸다는 듯 영웅의 추락을 반긴다.

수많은 퀴어 단체에서 많은 영웅이 등장하고 많은 영웅들이 해낸 것과 함께 내팽개쳐졌다. 그저 희디 흰 조각상처럼 무결하고 아름답기만을 요구하는, 소수자의 작은 잘못은 소수자 집단 전체의 죄악으로 취급하며 그의 모든 것을 폄훼하는 끔찍한 행태는 퀴어들이 죽는 걸 방관한다. 그저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만을 원하는 끔찍함이 소수자로 하여금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한다. 앞에 나선다는 건 그대로 외줄타기를 시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므로...


https://youtu.be/AYxLDTFJTG0

<사형선고>는 이 리뷰를 적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였다. 새 앨범이 나왔다는 소식에 기쁘게 달려가서 음악을 듣다가 엉엉 울게 한 노래였다. 왜냐면 나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사형선고를 당해 버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꽤나 끔찍하다. 더이상 숨기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커밍아웃을 했는데, 커밍아웃을 했다는 이유로 없는 사람 취급이 된다는 건 심장에 쓸쓸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비참하다. <사형선고>의 가사 한 줄 한줄이 모두 이해가 되는 심정이다. '재심을 청구하진 않았어 / 내심 기대한 건 맞지만 / 피곤해 피고인석에 다시 앉기는 싫어.'라는 가사처럼 나도 다시 가족들에게 날 이해해달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더 얘기하면 이해해 줄거라고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시 이해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싶지 않았다. 다시 피고인이 되어 나의 존재를 한 줄씩 이해시키는 건 너무 피곤하고 지리멸렬한 일이다.

그들이 나의 죽음에 건배한 것처럼 나도 나의 죽음을, 내가 결코 그들과 연결될 수 없는 타인임을 인정한 후에는 나는 죽을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사 한 소절, 한 구절이 모두 인정받지 못하는 나의 존재에 대한 이해같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 스스로 '괜찮아, 아무도 이해하지 않아도 혼자 살 수 있어.'라고 다독이던 걸 누군가가 '나도 죽을 만큼 행복해질 거야. 이젠 그럴 수 있어.'라고 동조해주는 것만 같아서 참 마음이 편했다.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나는 사형선고를 받고 사라졌지만,부활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죽어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혼자서도 죽을 만큼 행복해질 수 있어. 과거의 나의 죽음에 건배를 하며 나는 기꺼이 살아갈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보여서, 그래서 퀴어로 내가 살아가는 것과 엮어서 이승윤의 노래들 읽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이 비참함에 무너져있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서 좋다. 그럼에도 달은 참 예뻐서 살아서 사랑했던 이들의 이름을 불러도 보고, 나와 발 맞추어 걸으며 달이 참 예쁘다고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라 좋다. 뒤얽혀 있는 가시넝쿨 사이에서 향기로운 장미로 피어난 노래 한 송이를 건네주는 사람이라 좋고, 나의 절망 속 눈물과 찢어진 꿈들을 모아서 희망이라고 이름붙여주는 사람이라 좋다. 그의 노래는 폐허에서도 사랑을 꿈꾸고 거짓말쟁이가 된대도 사랑한다 말해줘서 좋다. 그리고 내 삶이 비참함 속에 가둬진 엉터리 우울 뒤에 내뱉어져 있대도, 그런 몽상 속에서 사는 건 짜릿하고 그저 특이한 뿐이라고 개운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노래를 불러줘서 좋다. 간혹 울더라도 그래도 웃을 수 있게 만들어줘서 고마웠다. 덕분에 나는 더 평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

다 쓰고 나니 문득 생각한다. 이거 퀴어한 리뷰가 맞나? 그냥 내가 생각나는대로 막 지껄인 300% 내 관점 리뷰가 아닌가? 아무튼 나는 퀴어니까 1%라도 퀴어함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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