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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현, 《그럼에도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이 책은 아주 평범한 이야기인 동시에 아주 특별한 이야기다. 문득 자신을 돌아본 20대라면 흔히 느끼는 불안과 불안정, 지금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외국이 두려운 동시에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한국 땅은 나를 점점 작아지게 하지만 어쩌면 저 머나먼 나라에는 자유가 있다는 꿈을 꾸는 시기 말이다. (그리고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했다면 서울에서 느끼는 불안에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진짜로 떠나서 몇 년간 돌아오지 않는 것은 특별하다. 떠났다가 돌아올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서울에서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커녕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막함이 사람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의 작가는 떠났고, 돌아왔다...

일상/책 2025.04.10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하느님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하느님, 오직 무정하고 무관심한 당신이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만을 믿는 유신론자지만 이 기도는 들으십시오. 비와 바람을 그쳐 주시고, 눈과 추위를 몰아내 주소서. 뜨거운 태양이 아니라 따사로운 태양을 드리워 더는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마소서. 고공에 오른 동지들이, 네 명의 노동자가 견뎌낼 수 있는 날씨를 주소서. 결국 그들을 내릴 것은 땅에 발 디디고 있는 다른 동지들이 할 것이며, 거대 자본과 악을 벌하는 것은 투쟁하는 고공의 동지가 할 것이기에 오직 그들이 이겨낼 수 있는 날씨만을 주시오. 당신은 무정하고 무관심하여 무능하기에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지만, 그래서 절대자라고 믿지도 않지만 오직 내 마음이 좋아지길 바라며 하는 기도요.

일상 2025.03.16

경찰이 저토록 다정했던 적이 있던가.

나는 경찰을 무서워한다. 싫어하고, 믿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은 내가 범죄를 저질렀음이 아닌, 경찰이 나를 범법자로 만들려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경찰은 방패로 벽을 치고 집회 신고 시간이 끝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차도로 사람들을 떠민다. 그렇게 떠밀린 사람들 중 하나가 나였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방향을 감을 잡지 못해 바깥쪽으로 나가며 잠시 어버버하는 사이에, 나는 경찰 방패와 맞닿게 되었다. 그 때 인도에서 차도로, 한 10센치가 조금 넘는 블럭 아래로 밀려 떨어질 때, 도로로 나가면 도로교통법 위반이라고 말하던 경찰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굴은 없는 어떤 검고 형광빛의 괴물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경찰서가 집 근처에 있으면 안전하다는데 나는 동네에서 경찰서가 있는 길로는 다니지 않는다. 내 옆에 있던 ..

일상 2025.01.03

그곳에 예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미 예수는 부활해서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목수라니까 건설노조원일수도 있을 테지요. 하나 분명한 것은 12월 3일 계엄의 밤에 바로 옷을 입고 국회 앞으로 달려 나간 이들이 예수라는 사실입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신도들을 바라보는 이는 예수가 아니고, 찬 거리에서 시민들과 앉아있는 이가 예수일 겁니다.12월 21일, 동지의 남태령 고개에 농민들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간 이가 예수였을 것이며, 그 고개를 넘기 위해 전원 체포를 불사하며 트랙터를 몰고 온 이가 예수였을 것입니다. 난방버스와 핫팩, 보조배터리, 담요, 따뜻한 식사를 보낸 이들이 예수였을 것이고, 이거 경찰 도시락이라고 거짓말하며 시민에게 식사를 전달해 준 라이더가 예수였을 것입니다. 날씨를 견뎌가며 동..

일상 2024.12.23

2024 12 24 대통령 윤석열 탄핵소추안 국회 가결

커다란 시위가 한 판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절차들은 더 높은 산이라서 저는 다시 거리로 뛰어나갈 것 같습니다. 왜 시위에 나가느냐고 묻는다면 저도 알 듯 말 듯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첫 번째 시위는 2008년 광우병 소고기 반대 집회였습니다. 초등학생 때였는데, 부모님의 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 그냥 언니와 둘이 결정해서 시위를 하러 나갔습니다. 그 때의 내가 무슨 마음인지 다시 한 번 묻고 싶어지는 요즘입니다. 두 번째 시위는 2015년입니다. 크게는 박근혜대통령 퇴진 시위라고 하지만, 이건 2014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이기도 했으며, 농업 민생을 요구하는 내용들 등등 다양한 각계각층의 요구사항이 들어있는 시위였습니다. 이 날, 멀리서 커다란 살수차를 본 듯도 싶습니다. 경찰..

일상 2024.12.14

241127 첫눈

오블완 챌린지의 마지막 날에 무슨 게시글을 써야하나 나름 생각을 많이 했고, 겨울과 관련된 책을 꺼내오려 했는데 첫 눈이 와버려서 눈 사진으로 마지막 이야기를 꺼내보려 해요. 이건 새벽 다섯시의 눈. 일어나자마자 환기하려 창 열었는데 눈이 펑펑펑 내리고있어서 바로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근데 펑펑이 아니라 퍼퍼벅 으아악 살려주세요 하며 눈이 오고있었음... 우박이 섞인건지 하여간에 맞을때도 아팠다.... 사진을 찍어도 어쩜 저렇게 전투적일 수 있을까... 눈아 눈아 그리고 오후 1시쯤 다시 나가서 눈을 맞았다. 정말 펑펑펑 내려서 금방 눈사람이 될 정도였는데, 사진을 찍으니 그저 눈이 폴폴 내리는 아름다운 화면이었다. (*위 사진과 같은 카메라 셋팅) 단풍이 다 떨어지지도 못한 계절에 내린 대설이라, 이..

사진 2024.11.27

환상 문학 단편선,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어린 날의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작품을 두 개 꼽자면, 《폭풍의 언덕》과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가 있다. 전자는 해피엔딩만 있던 나의 소설 세계에 배드엔딩과 열린결말을 가져왔고, 후자는 판타지문학과 현실..문학? 이 나누워져있던 나의 세계에 현실에 비현실이 섞인 문학을 가져왔다. 참고로 폭풍의언덕을 너무 어린 나이에 읽으면 피폐물 마니아가 된다. 권장연령(초등학교 5학년 이상)보다 늦게 읽어도 된다. 물론 나는 초등학교 입학한 첫 해에 읽었다...미친놈. 아무튼 다시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이야기로 돌아오면,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는 혈육이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다. 이 때 내 혈육은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미쳐 있었고,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인 「샹파이의 광부들」을 읽기 위해서 대출해왔다..

일상/책 2024.11.26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

나는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보는 사람이다. 같은 작품을 다시 본다고 지루해하지도 못하고, 등장인물들이 나타나는 첫 장면부터 울어 버리는 사람이다. 《인터스텔라》에서 5차원의 책장 뒤에 갇힌 쿠퍼 씨처럼,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싹싹 빌면서 엉엉 울곤 한다. 《인터스텔라》에서는 보통 처음 머피가 바람 부는 날 자신의 방에서 모스 부호를 발견했을 때부터 운다. 이정도면 거의 미친놈 아닐지.. 《승리호》에서는 꽃님이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부터 울기 시작한다. 뭐 이런 식으로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울어서 표지만 봐도, 포스터만 봐도 눈물이 나는 작품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이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 수록된 박애진의 「토요일」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너무 슬프다.「토요일」을 ..

일상/책 2024.11.25

무조림 만들기

주말 점심메뉴는 무조림입니다. 그리고 무가 작아서 다 했는데.. 한 4조각만 썰 껄 후회했습니다. 이거 내일모레까지 먹게 생김. 필요한건 간단하게 무와 간장, 생강 (팽이버섯 취향껏, 고춧가루 취향껏, 대파 취향껏, 만두 취향껏) 먼저 무를 적당히 썬 다음에 팬에 구워줍니다. 무가 어느정도 구워지고 나면 팽이버섯도 구워줍니다. 무를 좀 많이 구웠는데, 그냥 그을린 척만 할 정도로(?) 살짝만 구워줘도 충분해요. 그리고 만든 양념을 부어서 졸입니다. 양념 담았던 컵에 물까지 담아서 한 컵 부어주면 90%는 끝이라고 보면 됩니다. 색깔 구색상 대파도 넣고, 갑자기 만두가 먹고 싶어져서 만두도 넣고, 고춧가루는 아니지만 간 고추도 한블럭 넣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간장+생강+연두정도로만 맛을 내기 때문에..

일상/음식 2024.11.24

박애진, 《바람결에 흩날리고 강을따라 떠도는》

내가 어떤 책을 싫다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보통 싫다고 말하기 전에 가져다 버리기 때문에. 그런데 이 책은 버리기엔 재밌고, 읽기엔 그다지 내가 좋아하는 서술은 아니다.영주나 상인이 후원하는 '여행가'라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관이다. 그리고 책 뒷표지에는 '그곳에서는 금이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고, 강물에 섞여 흐른다고 했다.'라는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그래서 초반에 읽으면서 주인공이 시련과 고난을 지나서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가는 이야기일지 추측했다. 아무래도 황금의 폭포는 엘도라도 이야기니까... 생각과는 조금 다른 전개였지만, 아무튼 그래서 싫었다는 건 아니고 다른 이유로 읽기 피곤했다...일단 앞부분에서는, 주인공의 시련이 정신적인 쪽을 자극하는 동시에 육체적인 쪽에도 있어서 읽는 내가 너무..

일상/책 2024.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