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이경희, 《모래도시 속 인형들》

ZI0NY 2023. 11. 14. 15:35

끝까지 다 읽으면 작게 비명을 지르게 된다. 이런 미친 작가를 봤나. 출간 전에 예약펀딩해서 사놓고선 배송이 늦어져서 도서박람회에서 작가 사인회가 열렸을 때엔 책이 없어 현장에서 한 권 더 샀다. 진짜 재밌는 책만 두 권 사 두는데 어쩌다 보니 두 권 산거지만 어쨌든 굿... 훑듯이 빠르게 읽을 때도 흥미진진하고 재밌었는데 역시나 집중해서 각 잡고 읽으니 더더욱 재밌었다. 특히 같은 작가의 《테세우스의 배》를 읽은 지 며칠 안 되어 읽으니 소름이 두배. 최근 이 책이 SF어워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읽으려고 꺼냈는데 역시나 좋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곧 2편이 나온다고 한디. 이런 미친 작가... 당신은 최고야.

모래도시 속 인형들의 배경은 평택이다. 현재의 평택이 아니라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발달해 버리는 무법도시가 되어버린 미래의 평택이다. 참고로 나는 평택 미군기지인 험프리스 캠프에서 차로 15분 거리인 곳에서 나고 자랐다. 저긴 그냥 우리 동네인데 낙원이자 지옥이 되어버린 샌드박스가 된 시간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몰입도를 올려 줬다. '지도에는 더는 나오지 않는 평택의 시골길'이라는 설명을 읽으며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등굣길이라던가, 시장 옆쪽의 철물점과 도장집이 있는 작은 골목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데 집중을 못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연작소설답게 같은 배경에서 같은 주인공들이 서로 관련없어보이는 별개의 사건들을 하나씩 해결하는 게 하나의 소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연작소설답게 마지막에 그 모든 이야기들이 합쳐진다. 아주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배경 속에서 평범한 인물들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선량하지만 속물적이고, 냉정해 보이지만 다정하고, 친절해 보이지만 비열하고, 악독해 보이지만 겁 많은 평범한 사람들(혹은 안드로이드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질감이 느껴지면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슈퍼히어로 프로듀서⟩가 그 중 가장 평범해서 가장 기억에 남았다. 교육이라는 핑계로 학대를 당하는 아동·청소년들과 자신도 그렇게 자랐음에도 자기 자식에게 같은 길은 답습시키는 어른들과 그때의 기억을 고통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어른들이 모두 등장한다. 과거의 피해자가 현재에도 같은 폭력이 동일하게 발생하는 것을 보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현재의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은 SF적으로 비현실적인 동시에 평범한 자기 위로의 과정이었다. 이왕이면 자신이 슈퍼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작은 욕심까지 합쳐져서 진짜 좋은 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 같았다. 비록 초능력이 나오고, 공권력이 거의 기능하지 않는 땅에서 사적 제재가 과도하게 발생하고 있었지만...

빨리 다음 권이 나오기를 슬쩍 또 바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역시나 또다시 예약구매 할 거니까.

그리고 깜박하고 안 썼는데 《테세우스의 배》와 막판에 떡밥이 겹친다. 《테세우스의 배》에서도 마지막에 어? 하고 끝났는데 여기서도 떡밥이 겹친 채로 어? 하고 끝나버렸다. 다음 권에서 진짜 이 미친 도시의 미친 과학자들의 어떤 결말이 나오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