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이신주, 《공산주의자가 온다!》

ZI0NY 2023. 10. 22. 16:20

책을 사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표지가 매력적이라, 선호하는 저자라서, 연속하는 시리즈물이라서, 그리고 ★금서로 지정될까봐★ 그렇다. 2023년 8월 10일, 이 책이 출간되던 즈음에는 외부세력의 개입이라는 핑계를 쳐 대면서 기자를 고소하고 대통령실 도어스테핑도 스루하는 언론탄압을 보여주고, 이어서 사전투표에 조작이 있으니 사전투표를 안한다 어쩐다 하면서 북한 핑계를 또 줄줄히 대고 있길래 더 늦기 전에 이 책을 사야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공산주의자가 가는 것도 아니고 오고 있다는 제목이 금서로 지정되지 않을 리 없다... 뭐 사실 농반진반이고 SF를 좋아해서 샀다. 신작 SF는 일단 사서 읽고 별로면 버리고 좋으면 한 권 더 사는 것이 미덕이니까.

총 12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과학소설 특유의 쿰쿰한 맛이 나는 소설이다. 나는 SF소설을 크게 희망적이고 환상적이지만 묘하게 끝맛이 불길한 종류, 음울하고 불행하지만 어딘가 희망이 보이는 종류, 그리고 아주 일상적이지만 괴이한 종류와 비현실적이고 기묘하지만 극사실적인 종류로 나눈다. 이 책 안의 단편들은 전체적으로 평범해 보이지만 괴이하고, 그래서 역겹다고 느껴질정도로 징그럽고 불길한 이야기들로 채워져있다. 가장 견디기 힘든 이야기는 〈미궁의 아이〉. 지하철에서 읽다가 멀미했다. 이 이야기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묘사가 적나라하다거나 지나치게 잔혹해서라기보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쓰여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그럴듯하게 존재할법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현실에 이미 흔하게 있는' 것들을 다른 차원에서, 다른 우주에서, 다른 시간선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이질감이 드는 것이다. 단편 〈스포일러〉에서 사람들이 무언가를 분석할 때, 저거 그냥 XX 아냐? 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나오는 결론은 XX가 맞지만 XX이기 때문에 불행한 결말이 되어버린다. 그 전까지는 이렇게 부정적인 예측이 있을 거라고는 예측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공산주의자가 온다!〉는 냉전이 끝난 후에도 공산주의자들이 TV나 라디오 등의 통신을 이용하여 합중국의 국민들을 교란하고 있다고 믿는 미친 동네 아저씨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합중국의 시민이건 인민공화국의 인민이건 많은 사건들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결국 XX은 XXX 않고, 그 XX을 자신들이 XXX X 없도록 만든 것은 XX XX이라는걸.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서도 느꼈던 거지만 사실 사상이라는 것, 공산주의던 자본주의던 하는 것들은 중요치 않다. 결국 그걸 이용해서 사람을 살리는지 사람을 죽이는지가 중요할 뿐.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책을 금서로 지정한다는 반자유민주주의적인 사상이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해낼 머리가 있는 놈은 이 책이 그다지 공산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능력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튼 사긴 잘 했다. 우리가 여전히 살고 있는 평범하고 무던한 세계를 아주 시니컬하고 음울하게, 그런 동시에 흥미롭게 그려낸 이 책은 아주 재미있기 때문이다. 음침한 주제에 재밌기는 어렵다. 특히 나한테는. 그리고 작가의 말이 정말 재밌다. 책 내용은 인상쓰고 으으으 하며 읽어놓고서는 작가의 말은 읽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