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이경희, 《테세우스의 배》

ZI0NY 2023. 10. 19. 01:17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이 늦은 시간에 잡다한 일을 해도 되는가?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거나 저녁에 후딱 올리면 되는 걸 부여잡고 생각하다가 밤 12시가 지나서야 쓰기 시작하는 건 멀쩡한 인간인가? 하지만 나는 평생을 이렇게 미적대며 살아와서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아닐 것이다. 내 껍데기를 따라한 무언가라는 말이다...

그렇다 이건 테세우스의 배라는 패러독스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패러독스인데,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돌아온 테세우스를 칭송하며 그가 원정에서 탔던 배를 그대로 오랫동안 보존했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보존할 때에 모든 것이 테세우스가 탔던 그대로가 아니라 부분 부분을 부서질 때마다 새것으로 교체해서 보존한 건데, 과연 이 배의 모든 부분이 새것으로 교체되어서 단 한 부분도 테세우스와 원정을 떠났던 그 배가 아니라면 과인 이것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다.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한 적 없는가? 내가 기억을 잃었다면 그건 나인가? 내 기억이 온전하게 다른 사람에게 갔다면 그 사람이 나인가? 혹은 내 몸이 모두 인조인간으로 바뀌었다면(모든 부분이 의수, 의족 등으로 교체되었다면) 그것은 나인가? 잘라낸 내 몸의 모든 부분을 모아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나인가? 나는 솔직히 말해서 진짜 맨날 한다;; 이런 쓸데없이 거대한 질문을 말이다. 항상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가장 재밌는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우주에서 이런 질문에 허덕이는 나는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까지가 눈물 나게 좋다. 사설이 길었는데 그래서 이 책을 샀다. 단지 '테세우스의 배'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책은 아주 원론적인 방식의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를 따른다. 배와 동일하게, 몸이 교체된 주인공이 있다. 손가락, 팔, 다리, 그리고 뇌까지 로봇인 인간이다. 과연 이것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지만 어쨌든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재벌그룹 회장이고, 경영권 분쟁에 휘말려 있다. 이 전제가 많은 사실들을 당장 '진실'로 만들게끔 주인공을 몰아붙인다. 그냥 이렇게 블로그에 글이나 끄적거리는 나라면 내가 로봇이건 말건 일단 침대에 누워서 잠깐 책을 읽자...라고 하겠지만 당장 경영권 분쟁이 생긴 주인공은 자기도 자신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해야만 한다. 과연 진짜 석진환은 누구일지, 그리고 주인공은 진짜를 찾아내거나- 혹은 진짜가 자신이란 걸 확신할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된다. 

길게 구구절절 쓰고 싶은데, 혹시나 이걸 읽는 단 한 명의 사람이 이 책을 읽게 될까 봐 길게 쓰고 싶지가 않다. 내용을 조금이라도 유추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읽고 그냥 궁금해하고 그냥 고통스러워하며 그냥 절망해야 한다. 그래야 정말로 재밌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계산적일 수 있는지, 의료기술이 어디까지 발달할 수 있는지, 정보통신기술이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는지 한계까지 생각을 펼쳐나가면 이 사이버펑크 세계와 맞닿게 된다. 어쩌면 이 사이버펑크는 한 종류의 디스토피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좀 음침한 책이기도 하다. 이 텐션이 음울함을 슬쩍 감추고 액션 추리물스러운 느낌이나 묘하게 로맨틱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어서 재밌기도 하지만 좀 기괴하다. 원래 SF는 기괴한 맛이 있다. 묘하게 표현했지만 이건 아주 전통적인 '주인공의 자기 찾기형 소설'이라는 느낌도 든다. 진짜 자신을 찾아 떠나는 대모험! 수많은 위기와 시련이 닥치고 적들이 그를 흔들지만 결국 자신을 찾아나가는 이야기! 말이다. 주인공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치열하게 싸우고 치열하게 고민한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말이다. 이런 걸 보면 뇌까지 기계로 바꿔버려서 더는 '인간'이 남지 않았지만 그도 결국 인간이라는 답에 이른다. 고뇌하는 자는 마땅히 인간이 아닌가 하는 다소 데카르트적인 생각을 들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의 이름은 '석진환'이지만 나는 그를 석진환이라고 칭해도 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모든 것이 교체된 테세우스의 배가 진짜 '테세우스의 배'일지 아니면 모든 부분을 잃었지만 테세우스가 탔던 배가 '테세우스의 배'일지 결정을 못 내렸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석진환'이라고 칭할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진짜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까지가 삶이고 어디부터가 죽음인지를 고민했으면 좋겠다. 육체, 영혼, 기억, 자아, 주변의 인식, 그리고 자기의 인식 중 무엇이 과연 그 인간을 결정짓는지를 생각하는 건 아주 재미있고, 긴 고민의 시간이 될 테니까.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자 철학은 이런 고민만 수만개를 맨날 한다. 정말 즐겁지 않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