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콜롬비아 대표 현대소설선 《살아내기 위한 수많은 삶》

ZI0NY 2023. 10. 30. 18:03

차례는 아래와 같다.

더보기
  • 라우라 오르티스, ⟨아메리카 호랑이: 판테라 온카⟩
  • 오를란도 에체베리 베네데티, ⟨가택 연금⟩
  • 이흐안 렌테리아 살라사르, ⟨우리 할머니 리타⟩
  •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개구리⟩
  • 존 베터,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반가운 방문⟩
  • 새, ⟨후안 카르데나스⟩
  • 파트리시아 엥헬, ⟨성인 열전⟩
  • 마르가리타 가르시아 로바요, ⟨으깨진 다이아몬드⟩
  • 루이스 노리에가, ⟨선순환⟩
  • 필라르 킨타나, ⟨모래⟩
  • 안드레스 펠리페 솔라노의 작품 해설 ⟨삶의 여러 갈래⟩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박람회들도 다녀오며 사진도 찍었지만 블로그에 남길 가치가 없어서 실망하기를 몇 번 반복했고, 와중에 토익 점수를 갱신해야 해서 오랜만에 토익 시험도 봤다. 근 몇 년간 겨울 이불이 춥다는 생각이 들었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따뜻해지지 않는 이불속에서 잠들었다가 아침이 되면 금방 잊어버리는 날들이 꽤 오래 있었다는 말이다. 이불을 살 생각을 할 때면 '그거 그냥 덮어도 안 죽는데 그냥 후드티 입고 잔다음에 이불 살 돈으로 책이나 사자!' 같은 단순한 쾌락주의의 악마가 귀에서 속살거리는 것에 당하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결론은 드디어 이불을 샀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쓴 이불이 좀 오래 덮은 이불이다 싶더니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혈육이 쓰던 걸 물려받았었다. 그게 누군가에겐 당연한 논리였다. 걔는 곧 대학에 가니까 이참에 새 걸 사주고, 넌 걔가 쓰던걸 쓰렴. 서울의 4평짜리 원룸으로 탈출해서 고개를 돌려서 둘러볼 필요도 없는 작은 방 한 칸에는 물려받은 캐리어, 물려받은 이불, 물려받은 옷, 물려받은 책상, 온갖 물려받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어릴 때는 아마 세상의 전부가 부모였을 테니, 어떤 세계에서 내 순번은 점점 밀려났다는 뜻이다. 그때부터 10년이 넘게 지나서야 결국 마지막으로 이불을 바꾸면서 내가 나에게 선물한 것들만 내 공간에 남게 되었다.

이처럼 나의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은 맥락 없이 생겨나지 않았다. 제3세계는 사전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1세계)와 공산주의 국가(소비에트 연방을 중심으로 한 2세계)가 아닌 중립국을 의미하며 경제적 저개발 국가라거나 유럽, 북아메리카등 주류 지역이 아닌 곳을 통칭하기도 하지만 조금 느슨하게 보면 주류에 속하지 못하면서 국제정치의 외곽으로 밀려난 국가들을 통칭하기도 한다. 미국과 중국이(이전에는 소련이) 힘겨루기를 하건 말건 어쨌든 어떤 세계는 그들의 속도로 흘러간다. 거대한 국제정치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흐름에서 밀려나버려서일 수도 있다. 뉴스에는 나오지 않지만 매일 그들만의 전쟁이 있고, 그들만의 죽음이 있다. 세상이 대단한 고학력자의 죽음에는 쉽게 분노하면서 평범한 노동자는 몇백 명이 죽든 말든 중요치 않게 넘어가는 것처럼, 제 3세계에서의 전쟁은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난 새로 사서 막 첫 세탁을 마치고 침대에 깐 이 이불의 가벼운 따스함을 느끼면서 그래도 살아가는 이야기가 읽고 싶어서 책장에서 이 책을 꺼냈다.

이 책은 어쨌든 1세계에 가까운 나라에 사는(어쨌든 자본주의 국가지 않나.) 내 시야 밖에 있는 무수한 전쟁을 보여준다. 살아내기 위한 수많은 삶은 생존인 동시에 죽음이기도 하다. 마약, 밀입국, 수해, 난민, 국제결혼, 이민자, 정치적 망명과 같은 단어에서 단적으로 보이는 어떤 세계의 일부분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의 ⟨개구리⟩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던 이들과 그들의 가족이 기념행사에서 만나게 되며 잠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이 잠깐의 대화 속에는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어떤 방식으로 참전하게 될지 모른 채로 가다가 탈영한 군인들, 다른 나라의 전쟁에 자국인들을 징집해 보내면서 자국의 내전에서 우위를 가져가려는 정부, 전쟁 속에서 자발적으로(하지만 이걸 과연 진짜 자발성이라고 할 수 있을 리 없다) 혹은 강제로 성매매 내지는 성노예 산업으로 이끌리는 여성들, 또 그들을 관리하기 위한 노동시장의 탄생까지를 인물들의 대화 속에 등장시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도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들을 여러 이유로 말하지 못하고 오직 살아남아서 돌아왔다는 사실만 꺼낼 수 있다는 게 그들이 삶을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다정한 이야기를 꼽자면 파트리시아 엥헬의 ⟨성인 열전⟩이었다. 미국으로 결혼이민을 한 여성과 그의 남편이 살아가는 아주 평범한 사랑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앞에서부터 평범해 보였지만 사실 마약에 관한 이야기라던가 하는 다소 불쾌한 이야기라던가 어딘가 기분이 찜찜해지는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들만 나와서 ⟨성인 열전⟩을 읽으면서도 계속 한 켠에서는 불안했다. 결혼이민이 종종 그러하듯이, 폭력적인(내지는 이민자 아내를 보호하지 않는) 남편이라던가 하는 내용이 전개될까 봐 시댁 식구들이 등장할 때, 주변 이웃이 콜롬비아인이라고 아내를 꺼릴 때, 출산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 살은 더 많은 남편이 먼저 늙을 때까지 매 순간순간 불안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독후감을 이렇게 쓸 때마다 혹시 이 책을 읽을 누군가를 위해서 절대 이야기의 결말을 쓰지 않는데 이것만큼은 쓰고 싶었다. 이건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랑이야기라고. 나는 어떤 삶이든 사랑이 남아있다면 그래도 꽤 괜찮다고 믿으니 둘은 꽤 좋은 부부였을 것이고 나름 행복한 삶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마음에 드는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지만, 이번만큼은 책 뒷표지에 있는 작품 해설을 인용한다.

 

'일상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경희, 《모래도시 속 인형들》  (0) 2023.11.14
이신주, 《공산주의자가 온다!》  (0) 2023.10.22
이경희, 《테세우스의 배》  (1) 2023.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