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은 잔인해서 잘 읽지 않는다. 아니 거의 읽지 않는다고 봐야겠다. 비위가 약해서 사건현장 묘사만 봐도 좋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을 왜 샀는가 하면... 일단 《사장을 죽이고 싶나》라는 제목이 너무 흥미로워서, 그리고 출판사가 '아작'이라서 샀다. 아작이라면 SF일거라고 아주 단순하게 속단해버린 것이다. SF적인 요소가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있다고 볼 수도 없는 수준이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밀실추리물이다.
추리물을 읽으면서 집중하게 되는 건, '범인이 누구인지'와 '왜 죽였는지' 두 가지다. 뉴스나 수사 자료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아주 한정된 정보는 우리가 일정한 방향으로 생각을 유도한다. 추리를 진행시킬 수 있는 정보, 그와 동시에 잘못된 추리를 할 수 있는 정보를 읽으며 독자는 속고 의심하고 믿는다. 나는 특별히 추리를 하는 편은 아니고, 그냥 흐름에 따라 읽으면서 작가가 시키는대로 놀라고, 작가가 시키는대로 이해하는 단순한 독자라서 이 복잡한 이름도 얼기설기 엮여버린 사건들도 그럭저럭 쉽게 넘겼다. 다 읽은 감상은 나는 잘 따라가면서 작가에게 (여러 번) 속았다는 거고, 사장을 죽이기 전에는 시체를 잘 숨기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진짜로 이 모든 문제는 시체를 잘 숨기면 없었을 것이며 시체를 잘 숨기지 못하면 생겨났기 때문이다. 리빙포인트) 시체를 잘 숨기자!
전형적인 밀실 추리물이란 무엇인가 하면, 우연찮게 어떤 장소에 모인 사람들, 갑자기 죽어버린 사람, 이후 고립되어 밀실에 남겨진 서로를 살인자로 의심하는 사람들, 사라져버린 시체, 이어서 하나씩 사라지거나 죽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진짜 살인범을 찾아내고 밀실을 탈출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 책은 아주 전형적으로 밀실 추리물의 포맷을 따랐다. 그와 동시에 조금씩 변수를 심어서 이 전형성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다. (작가가 원래 쓰려고 했다던) 눈보라치는 산장이 아니라 급속성장하는 도시의 고층빌딩이 밀실이 되고, 이 빌딩의 주인이 사라진 시체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인 위바이통의 눈으로 독자는 이 사건을 바라본다. 오래 전의 첫사랑, 자신의 부모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 금융 엘리트, 심지어는 양안옌의 책과 빌딩까지 사건은 이 모든 것들을 신뢰하다가도 하나씩 불신하게 된다. 그래서 류창융 회장이 위바이통에게 한 "당신은 그녀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은, 류창융이 독자에게 건넨 말이란 걸 알 수 있다. "당신은 이 소설을 믿습니까?" 라고. 그래도 소설은 끝까지 사실을 말해주고, 끝까지 독자를 속인다.
초반부가 위바이통의 이야기라서 조금 지루한 게 사실이다. 총 3부로 되어있는 중, 1부의 절반정도는 이 책의 배경과 인물들의 기본 배경에 대한 설명들이 주를 이루다가 1부 막바지로 가면 본격적으로 사건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별로 많은 부분이 할당된 것이 아닌데 중심 사건 없이 여러 이야기들이 따로 진행되다보니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사실 이 부분들은 다 읽고 다시 읽었을 때 진짜 재미를 보장한다. 인물들의 찝찝한 행동거지나 시간이나 공간배경의 어색함이 모든 사건의 개요를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눈에 띄기 때문에 꼭, 꼭, 꼭 1부는 책을 다 읽고 바로 이어서 다시 읽길 바란다.
이렇게 사무실의 배치도가 나와있어서 상상하기 쉽다. 다만 책 어딘가부터 배치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더이상 이 배치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꼭 필요한 정보를 꼭 필요한 만큼은 반드시 제공하니까. 내 추측이 이 즈음에 하나 생겼는데 이게 맞아떨어졌다. 역시나 제공되지 않는 정보는 필요하지 않은 정보다.
평소에 지하철에서 오가면서 책을 읽을 때에 책 제목을 물어보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는데, 이 책은 무려 두 명이나 ... 제목을 물어봤다. 잘못 본 줄 알고 확인하신다며. 회사원들이 출퇴근 지하철에서 어떤 결심을... 하게 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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