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 《어느 노동자의 모험》

ZI0NY 2024. 7. 11. 22:19

블로그에 올릴 책을 고를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많거나, 누군가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좋겠거나, 혹은 작가가 우연한 검색 속에 이 책을 재밌게 읽었다는 독자를 발견해 주길 바라면서 쓰기 때문이다. 《어느 노동자의 모험》을 처음 읽은 건 출간된 직후였으나, 어쩐지 쓸 의욕이 나지 않았다. 자꾸 내용이 생각나서, 내 뇌의 간질거리는 어느 부분을 긁어주길 바라서 다시 읽으면서도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약 반년 간 계속 펼쳐 본 의리를 발휘해서 조금이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고 왜 이 책이 싫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목차는 아래 접은 글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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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은, 「삼도천 뱃사공 파업 연대기  은림, 「카스테라 이서영, 「노조 상근자가 여주 인생 파탄 내는 악녀로 빙의함구슬, 「슈퍼 로봇 특별 수당전효원, 「살처분 

 

이 책을 다섯 번은 읽었지만, 싫은 이유는 확실하다. 지나치게 사실적이라서 싫다. 내가 SF를 사랑하는 이유는 SF는 나를 불유쾌한 현실에서 꺼내서 광막한 우주로, 아득한 심해로,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나를 보내주기 때문이다. 나의 현실과 맞닿아 있지만 영원히 닿지 않을 머나먼 우주와 모든 것이 멸망한 디스토피아에 나를 던지기 때문에 나는 아주 현실적으로 비현실을 상상할 수 있다. 《어느 노동자의 모험》은 그런 과학적이고 우주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당장 내 코앞에 있는, 아니 그냥 '나'인 노동자의 이야기에 소설적인 장치를 더한 내용이다. 모든 이야기들이 모든 노동자와 노동운동가의 이야기지만 내 이야기는 이서영의 「노조 상근자가 여주 인생 파탄 내는 악녀로 빙의함」과 구슬의 「슈퍼 로봇 특별 수당」이었다. 어느 정도로 내 이야기였냐면, 처음 읽을 때는 읽기 싫어서 책을 덮고 싶었던... 헛구역질이 날 정도의 이야기였다.

 

먼저 이서영의 「노조 상근자가 여주 인생 파탄 내는 악녀로 빙의함」은 내가 로맨스판타지 소설을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다. 침대 위에서 백작가 아가씨로 환생해 버렸으면, 현대사회를 살았던 과거를 떠올렸으면, 어떻게 계급이 있어서 하녀가 있고 평민이 있고 자신은 그들을 지배하는 상위 계층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현대사회를, 평등한 민주사회를 꿈꾸는 민주시민이라면 응당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서는, 황태자비나 황후가 되는 걸 꿈꾸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 왕자를 바닥으로 끌어내려서 신분철폐와 계급철폐를 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계급을 공고화하며 자신은 상위 계급으로 올라서고, 하위 계급에게는 알량한 선의를 베푸는 것이 21세기 민주시민의 취해야 할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내 안에 자명하기에 항상 이런 뉘앙스가 강해지는 소설이나, 댓글을 보면 로맨스판타지/로맨스/현대판타지 소설을 하차하곤 했다. 내 안의 죽창이 날을 세우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노조 상근자가 여주 인생 파탄 내는 악녀로 빙의함」은 로맨스판타지 빙의물 소설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지만, 그 문법을 확실하게 비튼다. 로판빙의물답게 주인공은 원작소설의 주인공을 신경 쓰고, 그들(특히 원작 여주인공)이 행복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원작 그대로 두려고 하는 동시에 자신이 살 길을 찾아서 원작을 비튼다. 이렇게 보면 비슷하지만 결국 기존의 로판빙의물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인공이 자신이 살려면, 결국 여주인공이 원작의 궤도에서 내려와야 하고 원작의 궤도를 완전히 부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용에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리고 가장 짜릿한 부분을 제외하고 내가 꺼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문장이다. (물론 이 책에는 더 눈물 나고 더 명확하고 더 정신을 두드리는 문장이 많다.) 빠르게 몸을 망가뜨리는 방직공장의, 열셋에서 열아홉 살의 여자아이들이 몸이 더 망가지기 전에, 어딘가의 길바닥에서 죽기 전에, 결국 그 노동착취적인 방직공장에서도 쫓겨나 그보다 더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선택해야 하는 길이 고작 자신의 인생을 거두어줄 남자를 만나서 자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개중에 나은 남자의 아이를 가져서 그의 발목을 붙잡아 더 나은 삶을 쟁취하는 여자가 되기 전에는 (애매한 남자와는) 임신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불행한 현실이 있다. 하지만 결국 소녀들은 그런 길을 통한 진짜 행복 따위는 무시하고 눈을 뜨고 밑바닥에 있는 다른 소녀들,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서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동시에 날카롭고 현실적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의 단편을 읽으며 펑펑 울고, 책을 잠시 내려놓고 마저 울다가 다음 이야기를 읽고, 다음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울다가 책을 또 내려놓는 일을 다섯 번 반복해 가면 읽었다. 몇 개월 동안 몇십 번을 반복해서 읽으면서도 이 다섯 번씩 계속 우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소설 속에 있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나였고, 내 친구들이었고, 내 가족들이어서 안 울 수 없었다. 이미 나와 내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무시당하고 욕먹는 청소노동자고, 무능하고 똑바로 살지 않는 일용직 노동자고, 회사 그까짓 거 못 견디는 참을성 없는 퇴사자고, 범죄나 일으키는 외노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서 계속 내가 잘 아는 누군가가 등장인물에 겹쳐 보였다. 우리는 그냥 평범하게 잘 살고 싶을 뿐이었는데. 특별히 대단하게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소설을 읽고 싶었지 신문의 사회면을 읽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책을 골라버려서 이 책이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내가 아이유의 Love Wins All을 들으며 느꼈던 불쾌감은 이런 감정들과 맞닿아 있다. 이 노래는 나는 너를 사랑해서 함께 세상에게서 도망쳐서 저 끝까지, 길 잃을 때까지, 나쁜 결말까지 함께 가자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서있을 수 있도록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신문의 사회면이었지만 내가 사는 사회가 결국 사회면이지 예술면이겠는가... 일용직노동자고 비정규직노동자고 외국인 노동자고 퇴사자고 해고자인 수많은 내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고 친구가 아닌 노동자들마저 정당하게 노동하고 정당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비록 내가 할 수 있는 건 친구의 노동이슈를 노동부에 신고하는 걸 돕거나, 시위에 나가거나, 나도 몇 푼 못 번 돈을 또 기부하거나 하는 작은 일들이지만 어쨌든 우리가 좀 더 행복하기를 바란다. 비록 《어느 노동자의 모험》에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맺진 않았지만, 우리 이야기만큼은 그래도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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