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범유진, 《선샤인의 완벽한 죽음》

ZI0NY 2024. 2. 22. 22:04

올릴까 말까 고민이 길었던 책이다. 재미가 없는 책은 칼같이 올릴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 재미없어서는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키워드 중, '우주'와 '로봇'을 빼고 모든 게 다 들어가 있는 책이었다. 그런데 왜 독후감을 쓸까 말까 고민했냐면, 어떤 책은 반전이 없다고 생각하고 읽어야 진짜 재밌기 때문이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러하다. 학교에서 가장 선망받는 퀸카의 죽음, 그리고 이걸 추적하는 학생과 추적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학 재단과 이사장의 비밀... 이렇게만 보면 이건 아주 간단한 학원 추리물이다. 뒤에 반전이 있을 거라는 예측도 쉽게 할 수 있다. 사실 죽은 게 아니라 죽음으로 위장한 거라던가, 아무 관련 없어 보이던 추적자가 사실은 살인자라던가, 적처럼 보였던 이가 동지였다던가 하는 익숙한 반전들 말이다. 어쨌든 이건 익숙한 반전을 가져가지만 아주 생각치도 못한 방향으로 결말을 열어버린다.

 
《선샤인의 완벽한 죽음》은 무아교의 학생 '레이'가 무아제에 제출할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선샤인'의 죽음을 취재한다는 큰 틀 안에서 옴니버스식 구성을 취한다. 선샤인의 죽음과 관계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레이의 인터뷰를 통해 하나씩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각자의 관점 속에는 음습한 자신의 비밀이, 그리고 기괴한 학교의 비밀이 조각조각 숨겨져 있다. 사학 재단이 운영하는 고립된 지역의 에스컬레이터식 학교가 배경인 소설에서는 응당 숨겨진 비밀과 음모가 있기 마련이다.

그 비밀과 음모는 현재 재학생인 선샤인과 레이 등을 중심으로 흐르지만 그 윗 세대인 최창식과 선 교수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김신영이라는 새로운 이사장이 부임하고 본격적으로 음모가 학교에 자리잡게 되는데, '선하고 아름다운' 무아와 대치되는 지점에 최창식이 있다. 김신영이 부임한 이후의 무아교가 악에 가깝다는건 분명히 알 수 있지만 이전의 무아교가 낙원인지가 불분명하다고 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지, 작가가 미묘하게 의도한건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이전의 무아교도 '낙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하고 아름답다는 불확실한 교칙은 학생들을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물리적 폭력을 가하거나,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을 억압하는 요소였다. 무아교에서 금기시했던 것들, 큰 소리를 내거나 뛰어다니는 등 평범한 학교의 모습들은 악하고 추한가?
 
이런 식으로 많은 인간들의 소망과 욕망이 누군가에겐 선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악이 되는 모호함을 보여준다. 자식이 잘 되길 바란다는 핑계로 무아교에 버리는 것, 자식이 잘 되길 바라면서 무아교에 보내는 것.  그래서 무아교는 학생들에게 낙원이 되기도 했고 지옥이 되기도 했다. 이 지옥 속에서도 낙원을 찾아 서로의 손을 잡는 학생들이 있다면, 구석구석 아이들이 숨겨둔 낙원을 모두 부수려는 사람들도 있다. 지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남을 공격하기도 하고, 더 큰 지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발버둥치는 모든 인간들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는 거짓을 덧대어 더 큰 불행으로 기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거짓은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결말을 말하고 싶지가 않은데 모든 사건이 결말에 이어져 있어서 무슨 말을 더 해야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단 하나 확신하는 건, 펄은 다시 무아교로 돌아올거란 것이다. 선샤인은 무아교에만 있을 수 있고, 그래서 펄은 선샤인을 다시 존재하게 만들기 위해 무아교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선샤인의 낙원은 무아교가 아니었지만, 펄의 낙원은 무아교였으니까. 펄은 자신이 더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것조차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선샤인이 있던 완벽한 무아교를, 오직 선샤인이 자신만 친구로 여기는 완벽한 낙원을 사랑했을 뿐이다. 빛나는 진주가 아니라 발이 푹푹 빠지는 검고 어두운 갯벌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