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박애진, 《명월비선가》

ZI0NY 2024. 11. 20. 21:31

또 왔다! 조선스팀펑크! 이 책은 《기기인 도로》에서는 도로가 단편들을 연결하는 공통 인물로 등장한다. 그 중 박애진의 「군자의 길」과 세계관을 같이 하는 책이다.

 

회회인의 얼굴을 한 기기인인 '도로'는 '명월'이 유일하게 갖지 못한 남자다. 9년만에 도로가 다시 명월이 있는 명월관으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책의 막바지에 휘몰아치기보다 한 겹 한 겹 얇게 쌓아올라가는 명월의 집념과 욕망, 고민이 책에서 주를 이룬다. 결말은 그저 독자들이 추론한 그 모든 레이어들을 확정시킬 뿐이다. 

 

명월은 유일하게 도로가 인간이 아니라 기기인인 걸 눈치챈 사람이고, 그래서 그의 몸을 탐할 이유가 가장 없는 자인 동시에 그가 기기인이기 때문에 가장 그를 탐하는 자가 된다. 이 때만 해도 명월의 목표가 진짜 인간에 가까운 기기인을 만드는 걸까? 에 닿았는데 생각보다 더 큰 것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충격적인 방향으로.

네크로맨서는 육신이 무엇이든 그 곳에 혼을 불러온다. 죽은 자의 혼을 새 육신에 집어넣어서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낸다. 《명월비선가》에서는 혼의 개념이 없다. 스팀펑크답게 오직 육신에 인간이 있다. 심장도, 뼈도 아닌 오직 뇌가 인간의 모든 것이다. 죽은 자의 뇌를 냉동시켰다가 다시 연결해서 깨울 수 있는 기술만 준비된다면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명월비선가》는 명월이 비선을 타고 노래하는 이야기다. 결국 명월에게 필요한 건 같이 비선을 타고 싶었던 유일한 사람이다. 그를 돌려받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결국 죽음에서 다시 그를 꺼내어 온다. 그렇게 《명월비선가》는 완성된다.

명월에 대해서는 수많은 바리에이션이 존재하고, 진실과 상상 사이의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스팀펑크 세계관과 명월이 합쳐진 이 시대에서도 역사 기록에서 주변인이었던 수많은 양반 남성들이 그대로 주변인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금 우습다. 이 책을 읽으며 명월의 주변인들을 포함한, 명월 본인이 살아온 세계를 명월은 싫어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단 하나뿐인 정인을 돌려내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르고, 오직 그가 돌아올 세상을 상상하며 버텨냈을거라 생각하니 확실히, 죽은 사람을 살릴 정도려면 보통 단단한 사람으로는 안되겠구나 싶었다. 나는 세상이 싫으면  바로바로 회피하고 도망치는 부류의 나약한 사람인데, 겨우 사랑이 뭐라고...

《기기인도로》의 모든 단편들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감상이었는데, 《명월비선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흐름은 그대로 이어지고 오직 톱니바퀴만 사이사이 추가된 이 스팀펑크 세계 속에서도 그래도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인물들은 행복하길 바란다. 떠돌다 죽은 명월이 아니라 세상을 즐겁게 유랑하다 세상을 떠난 명월로 남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