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왔다. 조선스팀펑크! 《기기인 도로》는 조선시대에 증기기관이 있었다면... 이라는 if에서 시작되는 단편 연작선이다. 읽을수록 도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기도 하지만 말은 또 다 되는 이상한 재미가 있다. 역사랑 다른 것은 하나도 없는데, 기묘사화에 증기기관이 얽혀 있질 않나, 증기마와 증기마차를 타고 이성계가 전쟁엘 나가지 않나, 홍국영이 로봇이질 않나, 하나같이 역사와 다르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맨 첫번째로 수록된 김이환의 「증기사화」를 읽으며 훈구와 사림의 대립과 그로 인한 사화, 그리고 조광조와 주초위왕(이 소설에서는 초승심위왕이다) 사건을 사관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이것에 촘촘하게 증기기술이 엮어 둔 것이 기묘했다. 말이 되는데 말이 안 되는 이상한 이야기를 읽은 느낌이 들어서 더 그렇게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단편집을 읽으면 거의 100% 타율로 '이 중에 가장 좋은 건 역시 박애진 작가의 단편이었어' 라고 생각했었던 일이 더이상 100%는 아니게 될 수도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어림도 없지, 박애진의 「군자의 길」을 읽을 때에 처음엔 '뭐야? 이게 뭔데?' 하던 생각이 중반부를 넘어가며 활자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하고, 거의 막바지에서는 숨이 막히는 기분까지 느끼며 읽었다. 나랑 상성이 잘 맞나 봐... 항상 재밌는 걸 보면...
「군자의 길」은 「증기사화」와 같은 시대 배경을 가진다. 다만 주인공이 정치와 가까운 인물이 아니라 대감댁 (심지어는 이 '나리'도 그다지 정권과 가까운 인물은 아니다) 노비에 불과하다. 다만 실제로 기계 인간을 만들어내는 기술공이기에 기기인과 더 친밀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주인공은 인간이지만 인간의 사회에서는 관찰자의 위치에 있다. 그가 당사자가 되는 경우는 오직 매를 맞거나 (매 맞는 원인은 딱히 주인공 때문이 아니다), 명령을 들을 때 뿐이다. 하지만 기기인과 기기술을 다루는 기술자의 위치에서는 당사자가 되며, 주도적으로 사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다. 오히려 기계와의 관계에서 그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무식한 양반과 영특한 천민이 나와서 양반을 자기 맘대로 조종하는 듯한 풍자소설의 형태를 띄는 것 같지만, 소설 내용 자체는 웃을거리가 딱히 없는 노비의 삶만 보여진다. 소설의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내가 지금 웃고 있다고? 그렇구나. 웃음이 가시지를 않는구나."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순수하게 즐거움을 내가 느낄수는 없었다. 앞서서 내내 읽었던 그의 오십년 정도 되는 인생이 떠오르며 작은 유쾌함과, 섬뜩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낀 것 같다. 내 감정에 ~같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건 정말로 확신이 없어서 쓴다. 나는 무섭기도 통쾌하기도 가엾기도 안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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