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2024 12 24 대통령 윤석열 탄핵소추안 국회 가결

ZI0NY 2024. 12. 14. 23:28

커다란 시위가 한 판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절차들은 더 높은 산이라서 저는 다시 거리로 뛰어나갈 것 같습니다. 왜 시위에 나가느냐고 묻는다면 저도 알 듯 말 듯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첫 번째 시위는 2008년 광우병 소고기 반대 집회였습니다. 초등학생 때였는데, 부모님의 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 그냥 언니와 둘이 결정해서 시위를 하러 나갔습니다. 그 때의 내가 무슨 마음인지 다시 한 번 묻고 싶어지는 요즘입니다. 두 번째 시위는 2015년입니다. 크게는 박근혜대통령 퇴진 시위라고 하지만, 이건 2014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이기도 했으며, 농업 민생을 요구하는 내용들 등등 다양한 각계각층의 요구사항이 들어있는 시위였습니다. 이 날, 멀리서 커다란 살수차를 본 듯도 싶습니다. 경찰 버스와 다르게 생긴 차가 있어서 사진을 찍었던 것도 같으니까요. 쓰다 보니 한 가지가 더 떠오르는데 2010년즈음에 쌍용자동차 무력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던 사건도 제 인생에서 꽤 큰 일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평택 사람이니까요. 왜 사람은 살해당하고도 욕을 먹어야하는지가 제 청소년기의 주된 고민이었습니다. 사람은 왜 살아야하고 왜 죽어야하는가, 왜 비난받으며 왜 남을 비난하는가, 왜 고통스러워야 하며 도대체 왜 고통스럽게 만드는가 하는 일들 말입니다. 인간 종은 얼마나 가엽고 간악하기에 서로를 보듬고 해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연설을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저게 내가 학창시절에 매일같이 고민했던 것이라고. 그렇기에 나는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아프고 개운하며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얕게만 생각하고 지나치지 않았다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뭔가 더 좋은 것을 세상에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간지러움과, 범인인 나는 올려다볼수도 없는 세계라도 당신이 무언가를 책으로 엮어서 내게 보내준 것에 대해 큰 감사를 보냅니다. (제 감사는 당신께 아무것도 아니겠지만요)

그리고 2016년의 가을이 제가 본격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게 된 무언가였습니다. 저는 물을 싫어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무서워합니다.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않았던 말이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자기변명을 조금 하자면 세월호 사건을 보고싶지 않았습니다. 4월 16일, 학교에서 핸드폰을 돌려받고 무분별하게 SNS에 퍼진 동영상과 글들을 읽으며 반 아이들이 세월호 마지막 영상이라며 물 속의 소리가 나는 영상을 반에서 크게 틀었습니다. 그 소리가 저의 무언가를 자극했습니다. 아주 어린 날에, 물에 빠졌다가 구조되었던 날이 다시금 살아난 겁니다. 그 전까지는 크게 문제없던 물소리가 이후로는 제 숨통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내내 나는 세월호란 것에 대해 모르는 것처럼, 그 큰 사건을 외면하고 회피했습니다. 관련된 이야기만 들어도 숨이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2016년의 가을, 광화문에서 세월호 천막을 봤습니다. 추모공간과 향과 꽃을 본 순간 그동안의 내가 아주 비겁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와 동갑인 누군가가, 어쩌면 나였을지 모르는 누군가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피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만큼 창피했습니다.

그 때부터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후회하는 삶을 살지 말자고. 왜 시위에 나가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후회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저는 사실 이 후회란 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알 듯 말 듯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항상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런저런 수많은 생각들이 저를 스쳐지나갑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문득 손톱 옆의 거스러미처럼, 가슴 한 구석에 보풀이 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게 후회라고 생각합니다. 보풀이 일지 않도록 괜찮은 털실로 심장를 천천히 직조해서 적절한 세제와 세탁망으로, 혹은 손으로 정성다해 세탁해 주는 것이 제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거친 실로 대충 짜서 던져 두었다가 나중에 보고 그러지 말 걸, 하고 후회하며 한땀한땀 다시 보풀을 정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거리에 있었습니다. 빠리바게트의 노동탄압에 반대하는 시위,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여성혐오를 철폐하자는 시위, 학내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시위,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시위 등 어디든지 저 뒤 구석 어딘가에서 함께 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라면 조용히 오갔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거리에 있었습니다.

혼자 가는 것이지만, 단 한 명이라도 더 온다면 시위 현장은 그 한 명 분 만큼 안전해질거라는 작은 믿음 하나를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노조 사람들만, 농민들만, 장애인만, 이라는 식으로 적은 수가 모이면 공권력은 더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한 명의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한 명분의 목소리만 더 키워 준다면, 그렇게 투쟁하는 소수자의 옆에 서 있는다면 그만큼 우리는 모두 안전해질 수 있습니다. 12월 3일 밤 10시 30분, 국회를 지키러 온 시민들이 몇 명이었다면 국회는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만 명이 나섰기에 지킬 수 있었습니다. 공권력은 더 많은 인민의 단결을 두려워합니다. 더 많은 이를 폭력으로 대할수록 부담스러운 일이 되니까요. 그래서 혹시 모를 누군가의 안전을 위해 4일부터 매일 집회 현장에 나갔습니다. 고작 나의 목소리가 세상을 뒤집지는 못하겠지만 옆에 선 이 사람 한명만큼을 지킬 수 있을거라고 믿으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제 양심을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렇게 정성들여서 심장의 한 쪽 면을, 2024년의 겨울의 부분을 한 코 한 코 정성스럽게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보풀이 일지 않도록,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에 나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아주 이기적으로 미래의 나를 돌보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것은 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 앞엔 헌법재판소가 남아있고, 탄핵되고도 쏟아질 수많은 '우리'의 투쟁이 있습니다. 장애인의 이동권, 탈시설, 성소수자의 결혼과 성차별, 노동개악, 노동탄압, 외국인근로자에 대한 폭력과 저임금, 농민들의 양곡관리법, 동물권, 다양한 공간에서의 민주주의, 그리고 제가 잘 알지 못하는 또다른 많은 문제들이 세상엔 남아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많이 모여야 더 좋고 더 많은 것들을 관철시킬 수 있고, 나를 더 좋고 더 풍부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서로가 모두 또다른 '나'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깊이 듣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내는 투쟁을 이어가는 수많은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더 넓게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삶을 더 단단하게 지탱하기 위해서.